105인 사건은 1911년 조선총독부가 기독교계 민족 지도자들을 제거할 목적으로 조작한 대규모 탄압 사건이다. 일제는 데라우치 마사타케 총독 암살 미수라는 허위 각본을 만들어 평안도와 황해도 등 서북 지방의 기독교 지도자 500여 명을 체포했다. 이들은 증거 없이 체포되어 비인도적인 고문을 통해 거짓 자백을 강요당했으며, 이 중 123명이 기소되어 1심에서 105명이 유죄 판결을 받았다.
그러나 재판 과정에서 피고인들의 알리바이와 물증이 속속 드러나며 사건의 허구성이 명백해졌다. 이에 재한 선교사들은 미국 선교본부, 에딘버러 세계선교대회 계속위원회 등과 연대하여 사건의 진상을 국제사회에 알리고 외교적 압력을 행사하는 등 적극적으로 대응했다. 이러한 국제 여론의 압박으로 인해 항소심에서는 105명 중 99명이 무죄로 석방되었고, 유죄 판결을 받은 나머지 6명도 1915년 일본 천황의 특사 형식으로 석방되었다.
본 사건은 일제 식민 통치의 잔혹성과 기만성을 전 세계에 폭로했으며, 기독교가 당시 일제의 통치에 중대한 위협으로 인식되었음을 보여준다. 또한, 국내 민족 운동가들과 국제 선교 공동체의 연대가 어떻게 부당한 탄압에 맞서 싸울 수 있었는지를 보여주는 중요한 사례로 평가된다.
1. 사건의 배경 및 목적
1.1. 일제의 기독교 탄압 정책
1910년 한일병합 이후, 초대 총독으로 부임한 데라우치 마사타케는 노골적인 반기독교 정책을 펼쳤다. 이는 초대 통감이었던 이토 히로부미가 조선 통치를 합리화하기 위해 초기에 기독교에 우호적인 입장을 표명했던 것과는 대조적인 태도였다. 일제는 당시 교회를 다음과 같은 이유로 주요 탄압 대상으로 간주했다.
- 정치적 단체로의 인식: 교회는 예배를 통해 조선인들이 대규모로 모이는 유일한 합법적 공간이었으며, 1907년 평양 대부흥 운동과 1909년 백만인 구령 운동 등은 일제에 의해 조직적인 항일 운동 준비 모임으로 오인되었다.
- 민족 지도자들의 구심점: 신민회, 독립협회 등 민족 운동 단체의 핵심 인물 상당수가 기독교인이었으며, 이들은 교육 사업('1면에 1학교') 등을 통해 민족 계몽과 독립 의식을 고취했다.
- 서구 세력과의 연결고리: 미국 선교사들의 활동은 조선인들에게 서구 세계와의 연대 가능성을 열어주었으며, 이는 일제의 통치에 잠재적 위협 요소로 작용했다.
1909년 10월 안중근 의사의 이토 히로부미 암살 사건 이후, 일제는 기독교계에 대한 의심을 더욱 굳혔고, 1910년에는 안중근의 배후로 '해서교육총회'를 지목하여 김구 등 황해도 지역 기독교 지도자들을 대거 체포하는 등 탄압을 본격화했다.
1.2. 사건 조작의 목적
105인 사건은 이러한 배경 속에서 경무총감 아카시 모토지로와 구니토모 나오켄 경부 등이 주도하여 기획한 관제 허위 사건이었다. 그 목적은 다음과 같이 요약된다.
- 기독교계 민족 세력 제거: 기독교 부흥의 중심지였던 평안도와 황해도 등 서북 지역의 기독교 지도자들을 일망타진하여 반일 세력의 구심점을 파괴하고자 했다.
- 신민회 와해: 비밀결사 조직인 신민회의 실체를 파악하고, 그 핵심 간부들을 제거하여 조직을 와해시키려는 의도가 있었다.
- 선교사 영향력 통제: 사건에 미국 선교사들을 연루시켜 그들의 활동을 위축시키고 한국인에 대한 영향력을 차단하며, 미일 간 외교 마찰을 유도하여 선교사들을 궁지에 몰아넣고자 했다.
2. '데라우치 총독 암살 미수 사건'의 조작
2.1. 날조된 시나리오
일제가 꾸며낸 사건의 개요는 다음과 같다.
- 시점 및 장소: 1910년 12월, 데라우치 총독이 압록강 철교 준공식에 참석하기 위해 기차로 이동하던 중 선천역에 잠시 하차하는 순간을 노린다.
- 주모자 및 실행 계획: 안태국, 이승훈 등이 주도하여 평안도, 황해도 등지의 민족 운동가 수십 명과 함께 선천 신성학교에 숨겨둔 권총으로 총독을 암살하려 했다는 것이다.
- 허구성: 이 시나리오는 완벽한 날조였다. 실제 데라우치 총독이 탑승한 기차는 선천역에 정차하지도 않았다.
2.2. 대규모 검거와 잔혹한 고문
1911년 10월 12일 선천 신성중학교 학생 3명의 체포를 시작으로, 일제 헌병경찰은 평안도와 황해도 일대의 기독교 지도자 500~600여 명을 대대적으로 검거했다. 실체가 없는 사건이었기에 증거 확보는 불가능했고, 일제는 오직 고문을 통한 거짓 자백에만 의존했다.
당시 자행된 고문은 인간의 존엄성을 파괴하는 잔인무도한 방식이었으며, 주요 방법은 다음과 같다.
| 고문 유형 | 설명 |
| 신체 구타 및 압박 | 주먹과 구둣발로 복부와 전신을 비벼대거나 구타하는 방식. |
| 매달기 고문 | 손가락에 철봉을 끼우고 손끝을 올린 후 천장에 매달아 잡아당기는 방식. |
| 화상 고문 | 벌겋게 달군 쇠꼬챙이(부젓가락)로 다리를 지지고, 담뱃불로 얼굴을 지짐. |
| 수(水)고문 | 코에 물을 붓거나, 입을 벌리게 하고 석탄가루를 쑤셔 넣어 기절시키는 방식. |
| 장시간 기립/착석 | 며칠 동안 잠을 재우지 않고 음식을 주지 않은 채 세워두거나 앉혀두는 방식. |
| 기타 | 가죽 채찍과 대나무 묶음으로 온몸을 휘감아 끌기, 날카로운 대나무로 손톱 밑 찌르기 등. |
이러한 가혹한 고문으로 전덕기 목사 등 일부 인사들은 옥중에서 순국했으며, 대다수의 피고인들은 육체적, 정신적 한계 상황에서 허위 자백을 할 수밖에 없었다.
3. 재판 과정과 허구성 폭로
3.1. 1심 재판: 증거 없는 유죄 판결
1912년 6월 28일, 123명의 피고인에 대한 재판이 경성지방법원에서 시작되었다. 재판은 처음부터 끝까지 일제의 각본대로 진행되었다.
- 허위 자백의 증거 채택: 재판부는 고문으로 얻어낸 피고인들의 허위 자백만을 유일한 증거로 삼았다.
- 피고인들의 항변: 법정에 선 피고인들은 한결같이 고문에 의한 거짓 자백이었음을 주장하며 혐의를 부인했다.
- 허구성의 증명: 재판 과정에서 사건의 허구성을 입증하는 결정적인 증거들이 제시되었다.
- 알리바이: 암살 음모에 가담했다고 지목된 유동렬은 당시 서대문 감옥에 수감 중이었음이 증명되었다. 또한, 안태국, 이승훈 등 다른 주모자들은 유동렬의 출옥을 축하하기 위해 평양 명월관에서 회식한 영수증과 전보가 증거로 제출되었다.
- 물리적 증거 부재: 60여 명이 정주역에서 기차를 타고 선천으로 이동했다는 검찰의 주장에 대해, 법원 서기가 확인한 결과 당일 정주역의 차표 판매량은 총 11매에 불과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1912년 9월 28일, 재판부는 18명을 제외한 105명 전원에게 5년에서 10년의 징역형을 선고했다.
3.2. 항소심과 판결의 변화
1심 판결에 불복한 피고인 전원은 항소했다. 이 시점에서 재한 선교사들을 중심으로 한 국제사회의 구명 운동이 본격화되면서 사건은 새로운 국면을 맞았다.
- 항소심 진행: 1912년 11월 26일부터 1913년 3월 20일까지 경성복심법원에서 52회에 걸쳐 항소심이 진행되었다. 국제 여론을 의식한 재판부는 1심보다 신중한 태도를 보였다.
- 대규모 무죄 판결: 결국 1913년 3월 20일, 105명 중 99명이 무죄를 선고받고 석방되었다.
- 정치적 판결: 윤치호, 양기탁, 이승훈, 안태국, 임치정, 옥관빈 등 6명의 지도자급 인사에게만 각각 징역 5~6년형이 선고되었다. 이는 사건의 완전한 조작을 인정할 수 없었던 조선총독부의 체면을 세우기 위한 '정치적 결정'으로 평가된다.
- 최종 석방: 이들 6명은 상고가 기각되어 옥고를 치르다가 1915년 2월 13일, 다이쇼 천황 즉위 기념 특사 형식으로 전원 석방되면서 105인 사건은 막을 내렸다.
4. 국내외 선교사 및 선교단체의 대응
105인 사건의 진실이 밝혀지고 대규모 무죄 판결을 이끌어내는 데에는 국내외 선교사 및 선교단체의 조직적이고 헌신적인 노력이 결정적인 역할을 했다.
4.1. 재한 선교사들의 초기 대응
사건 발생 직후부터 재한 선교사들은 신속하고 체계적으로 움직였다.
- 상황 보고 및 구호 활동: 선천 지역의 미북장로회 선교사들은 즉시 미국 선교본부에 편지로 상황을 알리고, 의료선교사 샤록스(A. M. Sharrocks) 등을 서울로 보내 구속자 면회를 추진하고 의복과 성경을 전달했다.
- 일본 당국과의 교섭: 샤록스는 총독부 외사국장 고마쓰 미도리에게 장문의 편지를 보내 구속자들의 무고함을 변호하고, 고문과 날조의 부당함을 지적했다. 1912년 1월에는 마펫(S. A. Moffett), 에비슨(O. R. Avison) 등 선교사 대표단이 데라우치 총독을 직접 면담하여 공정한 조사를 촉구했다.
- 보고서 작성 및 국제 연대 모색: 윤치호가 체포되자 YMCA 총무 질레트(P. J. Gillett)와 회장 저다인(J. L. Gerdine)은 사건의 전말을 담은 장문의 보고서를 작성하여 국제 YMCA 대표이자 에딘버러 세계선교대회 계속위원회 위원장인 존 모트(John R. Mott)에게 발송, 국제적인 개입을 요청했다.
- 재판 감시: 선교사들은 재판에 방청객으로 꾸준히 참석하여 공정한 재판이 이루어지는지 감시하고, 재판 상황을 실시간으로 선교본부에 전보와 편지로 보고했다.
4.2. 미국 선교본부의 외교적 압박
재한 선교사들의 보고를 받은 미국 선교본부들은 이를 단순한 선교지 문제로 보지 않고, 조직적인 외교 활동을 전개했다.
- A. J. 브라운의 외교 활동: 미북장로회 해외선교부 총무 아서 브라운(Arthur J. Brown)은 초기에는 신중한 태도를 유지했으나, 사건이 조작되었음을 확신한 후 주미 일본대사관의 친다 대사 등과 직접 교섭하며 문제 해결을 시도했다.
- 언론을 통한 여론전: 선교본부들은 사건 관련 서신과 결의문을 언론에 공개하여 공정한 재판을 위한 국제 여론을 형성했다. 특히 북장로회 기관지 'The Continent'에 사건을 대대적으로 보도했다.
- 올다인 클럽 비밀회의: 1심 유죄 판결 후, 1912년 10월 11일 뉴욕 올다인 클럽에서 북장로회, 남북감리회, YMCA 등 각 선교부 대표들과 세스 로우 전 뉴욕시장, 존 포스터 전 국무장관 등 정계·학계·언론계 저명인사들이 참석한 비밀회의를 개최했다. 이 회의에서는 항소 지원, 일본 유력 인사 접촉, 공식 보고서 발간 등 구체적인 대응 방안을 결의했다.
- 보고서 발간: 회의 결의에 따라 브라운 총무는 사건의 전말을 담은 보고서 "The Korean Conspiracy Case"를 1912년 11월 20일 발간하여 사건의 부당성을 국제사회에 널리 알렸다.
4.3. 에딘버러 세계선교대회 계속위원회의 개입
세계적인 기독교 네트워크의 개입은 일본 정부에 상당한 압박으로 작용했다.
- 공식 의제 채택: 존 모트가 이끄는 에딘버러 세계선교대회 계속위원회는 1912년 10월 뉴욕 회의에서 105인 사건을 공식 의제로 채택하고, 주미 일본대사에게 우려를 표명하는 공식 서한을 발송했다.
- 영국에서의 압력: 계속위원회의 활동에 따라 영국 선교연합회도 행동에 나섰다. 1912년 12월, 회장인 아서 밸푸어(전 영국 총리)가 대표단을 이끌고 주영 일본대사를 면담하여 고문과 불공정 재판에 대해 강력히 항의했다.
5. 사건의 의의 및 평가
105인 사건은 한국 근대사와 기독교 역사에 다음과 같은 중요한 의의를 남겼다.
- 일제 탄압의 실상 폭로: 이 사건은 일제가 식민 통치를 유지하기 위해 얼마나 잔인하고 기만적인 방법을 동원했는지를 국제사회에 명백히 보여주었다.
- 기독교의 민족적 역할 입증: 일제가 기독교를 최대의 적으로 간주하고 대규모 탄압을 자행했다는 사실은 역설적으로 당시 기독교가 민족의 구심점이자 독립운동의 중요한 동력이었음을 증명한다.
- 국제 연대의 성공 사례: 재한 선교사와 미국 선교본부, 세계 기독교 단체들의 끈질기고 조직적인 대응은 부당한 국가 권력에 맞서 진실을 밝히고 99명의 무죄를 이끌어낸 성공적인 국제 연대의 사례로 기록된다.
- 민족 운동의 성장: 비록 신민회와 같은 조직이 와해되는 등 일시적인 타격을 입었지만, 이 사건을 통해 옥고를 치른 지도자들은 더욱 굳건한 항일 의지를 다지게 되었다. 이들은 출소 후 3·1 운동과 대한민국 임시정부 수립 등에서 핵심적인 역할을 수행하며 민족 운동을 한 단계 성장시키는 원동력이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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