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교회사

105인 사건과 선교사들의 다각적 대응 전략 심층 분석 보고서

제이람 2025. 10. 28. 10:45

I. 날조된 음모와 국제적 대응의 서막

  105인 사건은 일제강점기 초기, 조선총독부 경무총감부가 서북 지방을 중심으로 성장하던 기독교계 민족 지도자들을 탄압하고 그 세력을 위축시킬 목적으로 치밀하게 조작한 '관제 허위사건'으로 정의할 수 있습니다. 증거가 전무한 상태에서 '데라우치 총독 암살 미수'라는 가상의 음모를 날조하고, 수백 명의 기독교인을 체포하여 비인도적인 고문으로 허위 자백을 강요한 이 사건은 일제의 식민 통치 전략이 얼마나 폭압적이었는지를 명백히 보여줍니다.

 

  본 보고서의 목적은 이 비극적인 사건의 전개 과정 속에서 세 개의 주요 행위 주체, 즉 ① 사건 현장의 재한(在韓) 선교사, ② 미국의 선교 본부, ③ 에딘버러 세계선교대회 계속위원회가 어떻게 위기를 인식하고, 각자의 위치에서 다각적인 대응 전략을 펼쳤으며, 나아가 유기적으로 연대하여 사건의 전개에 결정적인 영향을 미쳤는지를 입체적으로 재구성하고 분석하는 데 있습니다.

 

  이 보고서는 각 주체의 활동을 개별적으로 심도 있게 분석하는 동시에, 이들의 상호작용이 어떻게 정보를 공유하고 전략을 조율하여 국제 여론을 형성했는지를 규명할 것입니다. 현장의 신속한 정보 전파가 미국 본부의 외교적 압박으로 이어지고, 이것이 다시 유럽을 포함한 전 세계적 기독교 네트워크의 연대를 촉발하는 과정을 추적함으로써, 105인 사건 대응이 단순한 구명 운동을 넘어선 고도의 국제적 연대 활동이었음을 밝히고자 합니다. 이를 통해 선교사들의 대응이 사건의 최종 결과에 미친 영향과 그 역사적 의의를 종합적으로 평가할 것입니다.

II. 사건의 발단과 전개: 기독교 민족주의를 향한 탄압

  105인 사건은 단순한 형사 사건이 아니었습니다. 이는 일제의 식민 통치 공고화 전략의 일환으로, 당시 민족의 구심점 역할을 하던 기독교 공동체를 와해시키기 위해 치밀하게 기획된 정치적 탄압이었습니다. 사건의 배경과 일제의 의도를 명확히 이해하는 것은 이후 전개될 선교사들의 대응 전략을 올바른 맥락에서 파악하는 데 필수적입니다.

1. 사건의 배경과 일제의 의도

  1910년 초대 총독으로 부임한 데라우치 마사타케(寺内正毅)는 전임 통감 이토 히로부미(伊藤博文)의 초기 유화적 제스처와는 달리 노골적인 반기독교 정책을 펼쳤습니다. 그는 교회를 단순한 종교 단체가 아닌, 항일 민족의식을 고취하는 잠재적 정치 단체로 간주했습니다. 특히 1907년 평양대부흥운동과 1909년 백만인 구령운동 등을 통해 폭발적으로 성장한 서북 지방의 기독교 공동체는 일제에게 심각한 위협으로 인식되었습니다. 또한, 안창호를 중심으로 한 비밀결사 신민회(新民會)의 주요 간부들이 대부분 기독교인이었다는 점은 이러한 의구심을 더욱 증폭시켰습니다. 일제는 이처럼 조직적으로 성장하며 민족의 역량을 결집하는 기독교 세력을 제거해야만 안정적인 식민 통치가 가능하다고 판단했습니다.

2. '데라우치 총독 암살 미수 사건' 날조

  일제는 평안도를 중심으로 한 기독교 지도자들을 일망타진할 구실을 만들기 위해 '데라우치 총독 암살 미수 사건'이라는 허구의 시나리오를 만들어냈습니다. 총독이 압록강 철교 준공식에 참석하기 위해 서순(西巡)하는 길에 선천역에서 잠시 하차하는 순간을 노려 암살을 시도했다는 것이 조작된 내용의 골자였습니다.

 

  사건의 서막은 1911년 10월 12일, 평안북도 선천의 기독교계 학교인 신성중학교 학생 3명을 검거하면서 열렸습니다. 이후 검거는 순식간에 인근 기독교계 학교의 학생과 교사 수십 명으로 확대되었고, 전국적으로 서북 지방의 교회 지도자 600여 명이 체포되는 대규모 탄압으로 번졌습니다. 피체된 이들은 영문도 모른 채 구금되었고, 가족 면회는 물론 음식이나 의복 반입조차 허락되지 않는 가혹한 상황에 놓였습니다.

3. 고문을 통한 허위 자백 강요와 선교사 연루 조작

  실체가 없는 사건이었기에 물증은 존재할 수 없었습니다. 일제 경찰과 검찰이 의존한 유일한 '증거'는 오직 고문을 통해 강제로 받아낸 허위 자백뿐이었습니다. 당시 경무총감 아카시 모토지로(明石元二郞)의 지휘 아래, 사건 조작을 주도한 구니토모 나오카네(國友尙謙) 경부 등은 체포된 한국인들에게 인간의 존엄성을 파괴하는 잔혹한 고문을 자행했습니다. 피해자들의 증언에 따르면, 이들은 양손을 등 뒤로 묶어 천장에 매다는 '학춤고문', 코와 입에 물을 붓는 물고문, 달군 쇠로 몸을 지지는 낙형(烙刑) 등 차마 입에 담기 힘든 방식으로 허위 자백을 강요했습니다.

 

  특히 일제는 이 사건의 배후에 미국 선교사들이 있다고 조작하여 그들의 영향력을 약화시키고자 했습니다. 구니토모의 「기소의견서」는 이러한 의도를 명백히 보여줍니다. 그는 스왈렌(W. L. Swallen, 소안련), 매큔(G. S. McCune, 윤산온), 베어드(W. M. Baird, 배위량) 등 평양과 선천 지역의 존경받는 선교사들이 암살 음모를 적극적으로 교사하고 지원했다고 날조했습니다. 예를 들어 매큔 선교사에 대해서는 "암살은 담대하게 마음을 단단히 하지 않으면 안 된다", "다윗은 작은 사람이면서도 혼자 큰일을 기도하여 적의 대장을 죽였다" 와 같은 말로 범죄를 고취했다고 기록하는 등, 구체적인 발언과 행동까지 조작하여 선교사들을 사건의 주모자로 몰아갔습니다.

 

  이처럼 일제의 탄압이 한국인 교인들을 넘어 선교사들에게까지 미치자, 현장의 선교사들은 더 이상 침묵할 수 없었습니다. 그들은 이 부당한 탄압과 조작에 맞서 직접적인 대응을 시작하며, 기나긴 투쟁의 첫발을 내디뎠습니다.

III. 재한 선교사들의 현장 중심 대응

  사건이 발생한 식민지 조선의 현장에서, 재한 선교사들은 누구보다 먼저 위기를 인지하고 대응에 나섰습니다. 이들의 활동은 단순한 항의를 넘어, 구체적인 구명 활동, 일본 당국과의 직접 교섭, 그리고 체계적인 정보 수집 및 전파로 이어지며 이후 전개될 국제적 연대 활동의 견고한 초석을 마련했습니다.

1. 초기 대응: 구속자 구명 활동과 일본 당국 접촉

  사건의 진원지였던 선천 지역의 미북장로회 선교사들은 교사와 학생들이 검거되자 즉각 행동에 나섰습니다. 의료선교사 샤록스(A. M. Sharrocks)를 중심으로 실행위원을 서울에 파견하여 구속자들의 안위를 파악하도록 했습니다. 이들은 서울 주재 미국 영사와 먼저 협의한 후, 조선총독부 외사국장 고마쓰 미도리(小松綠)와 같은 일본 고위 관료들을 직접 만나 구속자 면회와 의복 및 성경책 반입 허가를 받아내는 데 성공했습니다.

 

  특히 샤록스는 1911년 12월 16일 고마쓰 국장에게 장문의 편지를 보내 사건의 부당성을 논리적으로 지적했습니다. 그는 자신이 잘 아는 구속자들의 성품을 변호하고, 무분별한 체포가 야기한 공포 분위기와 고문에 대한 흉흉한 소문을 전하며, 이러한 폭압적인 방식이 오히려 한국인들의 반감을 키워 일본의 통치에 해가 될 것이라고 설득력 있게 조언했습니다. 이 편지는 사건 초기 선교사들의 인식을 보여주는 대표적인 자료로, 이후 미국 선교 본부의 외교 활동에도 중요한 근거로 활용되었습니다.

2. 대응의 확장: 데라우치 총독 면담과 공식 문제 제기

  사건이 해를 넘기며 장기화되자, 선교사 사회는 보다 공식적이고 강력한 대응이 필요하다고 판단했습니다. 마펫(Samuel A. Moffett), 애비슨(O. R. Avison) 등 교파를 대표하는 선교사들은 1912년 1월 23일, 데라우치 총독과의 직접 면담을 성사시켰습니다. 이들은 면담에 앞서 서면으로 진술 요지를 제출하여 자신들의 입장을 명확히 전달했습니다.

선교사 측 진술 요지

  • 체포된 기독교인 대다수는 평화롭고 법을 준수하는 무고한 이들임을 강조.
  • 신문 과정에서 고문이 사용된다는 소문에 대한 깊은 우려를 전달.
  • 이번 사건으로 민심이 이반되고 총독부 통치에 대한 불신이 커지고 있음을 경고하며 공정한 조사를 강력히 촉구.

데라우치 총독 답변 요지

  • 총독부는 정교분리 원칙을 철저히 준수하고 있으며 기독교를 탄압할 의도가 없다고 주장.
  • 고문 사용 의혹은 전혀 근거 없는 비난이라며 전면 부인.
  • 교회 관련 인물들이 불미스러운 음모에 연루된 것은 유감이며, 총독부의 조치는 정당한 법 집행임을 변호.

  총독의 답변은 사실상 선교사들의 요구를 모두 묵살하고 총독부의 입장을 변호하는 데 그쳤지만, 이 면담은 선교사들이 최고위급 책임자에게 직접 문제를 제기하고 공식적인 기록을 남겼다는 점에서 중요한 의미를 가집니다.

3. YMCA의 개입과 체계적 정보 수집

  사건의 양상은 1912년 2월 9일, 국제적으로 저명한 기독교 지도자였던 윤치호가 체포되면서 중대한 전환점을 맞았습니다. YMCA 부회장이었던 그의 체포는 이 사건이 미북장로회만의 문제가 아님을 분명히 보여주었고, YMCA와 남감리회 선교사들의 적극적인 개입을 이끌어냈습니다.

 

  YMCA 총무 질레트(P. J. Gillett)와 회장 저다인(J. L. Gerdine)은 즉시 사건에 대한 체계적인 조사에 착수했습니다. 이들은 각종 증언과 자료를 수집하여 장문의 보고서를 작성했고, 1912년 5월 22일 자로 국제 YMCA 대표이자 에딘버러 세계선교대회 계속위원회 위원장이었던 J. R. 모트(John R. Mott)에게 이 보고서를 발송했습니다. 이 보고서는 사건의 진상을 국제 사회에 알리고, 이후 미국과 유럽의 선교계가 조직적으로 대응하는 데 결정적인 기폭제 역할을 했습니다.

4. 재판 과정 감시와 정보 전파

  1912년 6월 28일 경성지방법원에서 1심 재판이 시작되자, 수많은 선교사들이 방청객으로 참여하여 재판 과정을 면밀히 감시했습니다. 여기에는 평양의 마펫과 서울의 질레트 등 주요 선교 지도자들이 포함되어 있었습니다. 이들은 법정에서 벌어지는 불공정한 절차, 고문에 의한 허위 자백이 증거로 채택되는 과정, 그리고 검찰이 선교사들을 배후로 지목하는 터무니없는 주장들을 직접 목격했습니다.

 

  선교사들은 이러한 재판 상황을 편지와 전보를 통해 미국 선교 본부에 거의 실시간으로 알렸습니다. 특히 재판 과정에서 연루 혐의를 받은 선교사 19명의 명단이 공개되자, 이 정보는 즉각 본국에 타전되었습니다. 이처럼 현장에서 목숨을 걸고 수집된 생생한 정보는 단순한 보고를 넘어, 대서양 건너 미국 선교 본부가 외교적 협상 테이블과 여론이라는 새로운 전쟁터로 나아갈 수 있게 하는 가장 강력한 무기가 되었습니다.

IV. 미국 선교 본부의 외교적 압박 전략

  재한 선교사들이 전송한 긴급한 보고와 구체적인 정보들은 미국 선교 본부를 움직였습니다. 이들의 대응은 단순한 구명 운동을 넘어, 미국 내 여론을 환기하고 일본 정부를 직접 압박하는 치밀한 외교 전략으로 발전했습니다. 특히 미북장로회 해외선교부를 중심으로 한 활동은 사건의 국면을 전환시키는 중요한 동력이 되었습니다.

1. A.J. 브라운 총무의 신중한 외교적 접근

  미북장로회 해외선교부 총무 아서 브라운(Arthur J. Brown)은 초기 대응에서 매우 신중하고 전략적인 태도를 보였습니다. 그는 섣불리 미국 정부를 개입시켜 미-일 간의 외교 문제로 비화시키는 것을 피하고, 주미 일본대사관과의 직접 교섭을 통해 문제를 해결하고자 했습니다.

 

  1912년 2월, 브라운 총무는 주미 일본 임시대리대사 하니하라 마사나오(埴原正直)를 만나 선교사들이 전해온 우려를 전달하며, 일본 정부의 공정한 처리를 정중히 요청했습니다. 이후 발표한 언론 성명서에서 그는 "우리는 일본인 고위 관리들이 이러한 상황을 현명하고 효과적으로 다루기 쉬운 지적이고 공정한 사람들이라고 믿는다"며 일본 정부에 대한 신뢰를 표명하면서도, "한국인들이 공정하게 취급되고 저지른 잘못은 어떤 잘못이라도 올바르게 될 것을 믿는다"고 촉구했습니다. 이는 일본의 체면을 세워주면서도 문제 해결을 압박하는 고도의 외교적 수사였습니다.

2. 선교부 연합 대응과 여론전의 시작

  그러나 1심 재판에서 105인 전원에게 유죄가 선고되자, 브라운 총무의 신중한 외교 전략은 보다 공세적인 여론전으로 전환되었습니다. 그는 이 사건이 단일 선교부의 힘만으로는 해결하기 어렵다고 판단하고, 북장로회, 남북감리회, YMCA 등 여러 선교부의 연합 회의를 소집했습니다. 이 회의를 통해 각 선교부는 정보를 공유하고 공동 대응 방안을 모색했습니다.

 

  이들은 그동안 일본과의 관계를 고려해 비공개로 다루었던 사건 관련 서신과 공식 문건들을 언론에 공개하기로 결의했습니다. 이는 국제 사회에 사건의 부당함을 널리 알리고, 공정한 항소심 재판이 이루어지도록 일본 정부를 압박하기 위한 강력한 여론 형성 전략이었습니다.

3. '올다인 클럽 비밀회의'와 종합 대응책 수립

  선교 본부들의 대응 전략은 1912년 10월 11일, 뉴욕 올다인 클럽(Aldine Club)에서 열린 비밀회의에서 정점에 달했습니다. 이 회의에는 선교부 대표들뿐만 아니라, 전 뉴욕 시장 세스 로우(Seth Low), 전 국무장관 존 포스터(John W. Foster)와 같은 정계 거물은 물론, 하버드 대학교 전 총장 찰스 엘리엇(Charles W. Eliot), 예일 대학교 총장 아서 해들리(Arthur T. Hadley) 등 당대 미국을 움직이는 학계와 언론계의 최고위급 인사들이 대거 참석했습니다. 이는 사건 대응이 단순한 선교계의 문제를 넘어 미국의 지성 및 정치 엘리트 그룹의 주요 관심사로 격상되었음을 의미합니다. 이 회의에서 합의된 핵심 전략은 다음과 같습니다.

  • 미국 정부의 공식 개입 요구를 지양하고, 일본 당국과 직접 교섭하는 기존 정책을 유지한다.
  • 피고인들의 항소심을 적극 지원하며, 일본 내 최고 수준의 변호사를 선임하도록 추진한다.
  • 오쿠마 시게노부(大隈重信)와 같은 일본 내 유력 인사 및 기독교인들과의 협력을 모색하여 일본 내부로부터의 변화를 유도한다.
  • 주미 일본 대사와의 추가 회담을 통해 외교적 압력을 지속하고, 사건의 부당성을 계속해서 제기한다.
  • 사건의 전말과 진실을 담은 공식 보고서를 작성하여 국제 사회에 배포하기로 결정한다.

4. 보고서 『The Korean Conspiracy Case』 발간과 그 영향

  올다인 클럽 회의의 결의에 따라, 브라운 총무는 사건의 모든 경과와 증거, 재판의 부당성을 집대성한 공식 보고서 『The Korean Conspiracy Case』를 1912년 11월 20일 자로 발간했습니다. 이 보고서는 논리정연한 서술과 방대한 자료를 바탕으로 105인 사건이 일제의 조작임을 명백히 폭로했습니다.

 

  이 보고서는 미국과 유럽의 정계, 언론계, 교계 지도자들에게 광범위하게 배포되어 국제 사회가 사건의 진실을 정확히 인식하는 데 결정적인 역할을 했습니다. 이는 단순한 정보 제공을 넘어, "문명국"을 자처하던 일본 제국의 비인도적 실상을 고발함으로써, 항소심 재판에 공정성을 기하도록 일본 정부에 상당한 도덕적, 외교적 압력을 가하는 가장 효과적인 수단이 되었습니다.

V. 에딘버러 세계선교대회 계속위원회의 국제적 연대

  미국 선교 본부의 체계적인 대응은 대서양을 건너 유럽을 포함한 전 세계적인 기독교 연대 활동으로 확산되었습니다. 이 과정에서 중심적인 역할을 한 기구가 바로 에딘버러 세계선교대회 계속위원회(Continuation Committee of the World Missionary Conference, Edinburgh)였습니다. 이 국제적 연대는 일본 정부에 더 큰 차원의 압박을 가했으며, 사건 해결에 있어 상징적이면서도 실질적인 중요성을 가졌습니다.

1. J.R. 모트 위원장의 개입과 국제 네트워크 가동

  YMCA 총무 질레트와 저다인이 보낸 상세한 보고서를 접수한 J. R. 모트(John R. Mott) 위원장은 즉시 행동에 나섰습니다. 그는 에딘버러 계속위원회가 보유한 막강한 국제적 네트워크를 활용했습니다. 모트는 각국에 포진한 실행위원들에게 사건의 개요를 알리고, 해당 국가에 주재하는 일본 대사관에 비공식적으로 접촉하여 "서구의 중요한 계층이 이 재판을 예의주시하고 있으며, 가장 정의롭고 공개적인 재판을 희망한다"는 메시지를 전달하도록 했습니다. 이는 직접적인 내정간섭이라는 비판을 피하면서도, 사건이 국제적인 관심사임을 분명히 하여 일본 정부를 압박하는 세련된 외교 전략이었습니다. 물론, 일본 주재 선교사들 사이에서는 사건을 다르게 보는 시각도 존재했으나, 모트 위원장은 한국 현장의 긴급성과 윤치호의 구속이라는 상징성을 더 중대하게 판단했습니다.

2. 계속위원회의 공식 대응과 외교적 메시지

  계속위원회는 1912년 10월 1일, 미국 뉴욕의 레이크 모홍크(Lake Mohonk)에서 열린 회의에서 105인 사건을 공식 안건으로 채택했습니다. 오랜 토론 끝에 위원회는 한국 교회와 선교사들에 대한 깊은 공감을 표명하고, 이 문제를 지속적으로 주시하기로 결의했습니다.

 

  회의 결의에 따라 주미 일본대사 친다 스테미(珍田捨巳)에게 보낸 공식 서신은 이들의 외교적 수사법을 잘 보여줍니다. 서신은 "그 나라의 내정이나 재판에 간여하는 것이 우리 위원회의 기능은 아니지만"이라고 전제하며 일본의 주권을 존중하는 태도를 보이면서도, "우리가 받은 보고서들에 의하면 어떤 경우에는 불공정하다는 우려를 일깨운다"며 사건에 대한 깊은 우려를 명확히 표명했습니다. 이는 일본 정부의 체면을 손상시키지 않으면서도 강력한 경고의 메시지를 전달하는 효과적인 방식이었습니다.

3. 영국 선교연합회의 공식 항의와 그 영향

  국제적 연대 활동의 정점은 영국에서 이루어졌습니다. 에딘버러 계속위원회와 긴밀한 관계를 맺고 있던 영국 선교연합회(Conference of Missionary Societies in Great Britain & Ireland)는 1912년 12월 17일, 회장 자격으로 전직 총리였던 아서 밸포어(Arthur J. Balfour)를 필두로 한 대표단을 구성하여 주영 일본대사 가토 다카아키(加藤高明)를 직접 면담하고 공식적으로 항의했습니다.

 

  당시 영일동맹 관계에 있던 동맹국의 전직 총리가 직접 나서 사건의 부당함, 특히 고문에 의한 자백 강요 문제를 제기한 것은 일본 정부에 엄청난 외교적 부담으로 작용했습니다. 이는 미국 내에서의 압력을 넘어, 일본의 가장 중요한 외교 파트너로부터의 직접적인 문제 제기였기 때문입니다. 이 활동은 일본으로 하여금 105인 사건을 더 이상 자국의 문제로만 치부할 수 없게 만드는 결정적인 계기가 되었습니다.

VI. 선교사 대응의 결과와 역사적 의의

  1912년 9월, 1심 재판에서 기소된 123명 중 105명 전원에게 유죄가 선고되며 암울하게 시작된 105인 사건은 국제 사회의 다층적인 압박 속에서 극적인 반전을 맞이했습니다. 항소심 재판(경성복심법원)은 1심보다 훨씬 신중하게 진행되었고, 마침내 1913년 3월 20일, 105명 중 99명에게 무죄가 선고되었습니다. 비록 윤치호, 양기탁, 이승훈 등 6명은 총독부의 체면을 세우기 위한 '정치적 판결'로 유죄가 확정되었지만, 이들 역시 형기를 다 채우지 않은 1915년 2월 13일, 천황 특사 형식으로 모두 석방됨으로써 사건은 최종적으로 마무리되었습니다.

 

  이러한 결과를 이끌어낸 동력은 세 축의 유기적인 연대 활동이 상호보완적으로 작용한 덕분이었습니다. 첫째, 재한 선교사의 신속한 현장 대응은 모든 대응의 출발점이었습니다. 이들이 위험을 무릅쓰고 불법적인 체포와 고문의 실상을 기록하고 외부 세계에 알리지 않았다면 이후의 모든 대응은 불가능했을 것입니다. 둘째, 미국 선교 본부의 체계적 외교 및 여론 전략은 현장의 정보를 강력한 압박 수단으로 전환시켰습니다. A. J. 브라운 총무의 정교한 외교와 『The Korean Conspiracy Case』 보고서 발간은 신뢰할 수 있는 증거 없이는 결코 성공할 수 없었습니다. 마지막으로, 에딘버러 계속위원회를 통한 국제적 연대는 이 문제를 세계 기독교 공동체의 의제로 격상시켜 일본에 결정적인 외교적 부담을 안겼으며, 이는 현장과 미국 본부의 체계적인 보고가 있었기에 가능한 일이었습니다.

 

  결론적으로, 105인 사건에 대한 선교사들의 대응은 당시 미국 정부가 식민지 문제에 개입을 꺼리던 국제 정세와 그들이 처한 제약 속에서 선택할 수 있었던 '최선의 대응'이었습니다. 그들의 활동은 단순히 억울하게 투옥된 기독교인을 구명하는 차원을 넘어, 일제 식민 통치의 비인도성과 사법 제도의 허구성을 국제 사회에 폭로하는 중요한 계기가 되었습니다. 나아가 이 사건은 한국 기독교가 민족의 고난에 동참하고 연대했음을 보여주는 상징적인 역사적 사례로, 한국 근현대사에서 지울 수 없는 깊은 족적을 남겼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