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교회사

1920-1940년대 한국 기독교 지성과 사회 운동: 주요 인물과 쟁점 분석

제이람 2025. 11. 4. 21:22

  1920년대부터 1940년대에 이르는 시기는 일제 강점기의 심화와 해방 이후의 이념적 혼란이 교차하는 격동기였다. 이 시기 한국 기독교 지성인과 지도자들은 민족의 정체성, 사회 개혁, 신학적 순수성이라는 복합적인 과제에 직면했다. 이들은 단순한 신앙 활동을 넘어, 시대의 아픔에 응답하며 다양한 사회 운동과 사상적 투쟁을 전개했다.

 

  핵심적으로, 기독교 사회 운동은 YMCA의 민주주의 이념 전파와 황애덕을 중심으로 한 YWCA의 여성 및 농촌 계몽 운동으로 구체화되었다. 해방 이후에는 공창폐지운동이 '건국의 초석'으로 인식되었으나, 김말봉의 소설에서 드러나듯 이는 좌우익의 복잡한 이해관계가 얽힌 문제였다.

 

  신앙적 저항은 동아기독교회의 신사참배 거부와 같은 조직적이고 순교적인 투쟁으로 나타났으며, 박형룡, 김익두 등 개인 차원의 수난도 이어졌다. 이러한 위기 속에서 이용도 목사는 신비주의적 부흥 운동으로, 김교신은 무교회주의와 우언적 글쓰기를 통해 사회와 기성교회를 비판하며 영적 대안을 제시했다.

 

  신학적으로는 박형룡으로 대표되는 보수 정통주의와 김재준을 중심으로 한 진보적 신학이 대립하며 한국 장로교 분열의 단초를 제공했다. 이처럼 당대 기독교 지도자들은 각자의 신학적, 사상적 기반 위에서 시대적 과제에 응답하며 오늘날 한국 기독교의 지형을 형성하는 중요한 족적을 남겼다.

I. 기독교 사회 운동의 전개

1. YMCA와 청년 계몽 운동

  1920-30년대 한국기독교청년회(YMCA)는 기관지 『청년』(1921-1940)을 통해 당대 청년들에게 세계적 시야와 사회 개혁의 비전을 제시하는 핵심적인 역할을 수행했다. 이는 단순한 시민운동을 넘어, 기독교 신앙을 기반으로 한 사회 참여 운동이었다.

  • 세계화와 민주주의 정치 구상
    • 신흥우는 『청년』 창간호(1921)에서 "듸모크라시의 意義"를 통해 세계 정치 동향을 분석하며, 천황 중심의 일제 체제 하에서 담대하게 민주주의 정치를 가장 합리적인 대안으로 제시했다. 그는 미국의 대통령 중심제보다 국민의 의사를 더 잘 반영하는 영국의 의원내각제를 이상적 모델로 평가하며 기독 청년들이 미래지향적 안목으로 이를 추진할 것을 촉구했다.
  • 문화·문명 진보 지향과 경제 혼란 대비
    • 홍병선은 과거의 퇴행적 악습을 버리고 문화·문명적 진보를 이룰 것을 주장하며, 과도기의 고통을 극복하고 미래를 선택해야 한다고 역설했다.
    • 안국선은 제1차 세계대전 이후 확산되는 노동운동과 사회주의 사상을 주시하며 세계 경제 혼란을 예견하고, 이에 대비하기 위한 '조선 본위의 경제정책'과 '조선인 본위의 산업정책' 수립의 시급성을 강조했다.
  • 청년 교육과 사회 개혁의 사명
    • YMCA는 청년들의 인격 교육을 최우선 과제로 삼았으며, 직업에는 귀천이 없음을 강조하며 성실한 자세와 사회적 소명을 가질 것을 주문했다.
    • 특히 남존여비 사상 철폐와 여성 인권 신장을 중요한 과업으로 삼았다. 장응진은 교회 내 남녀 좌석 구분과 같은 관행을 비판하며, 여성 교육의 활성화가 남녀평등을 구현하기 위한 핵심 과제임을 역설했다.
  • 기독교 신앙의 기반
    • YMCA의 모든 사회 운동은 기독교 신앙을 근본적인 인프라로 삼았다. 이들은 사회 개혁, 청년 교육, 여성 인권 등의 과업이 기독교 신앙에 근거할 때 진정한 의미와 가치를 발휘할 수 있다고 보았다. 신흥우는 1931년에 이르러 농촌 문제의 근본적 해결책이 사회 구조 개선보다 '정신 갱생', 즉 기독교적 내적 갱신에 있다고 주장하며 신앙의 중심성을 재확인했다.

2. 여성 운동과 농촌 계몽

  황애덕(황에스더)은 1920년대 말부터 1930년대에 걸쳐 조선YWCA연합회를 중심으로 여성의 사회 참여와 농촌 문제 해결에 헌신한 대표적인 인물이다. 그의 활동은 "농촌을 살리는 길이 민족을 살리는 길"이라는 확고한 신념에 기반했다.

  • 농촌 계몽 운동
    • 지도자 양성: 숭의여자신학교에 '농촌사업지도교육과'를 신설하여 여성 지도자를 양성하고, 조선YWCA연합회 농촌부 간사로서 농촌 사업을 주도했다.
    • 기독교 이상촌 건설: 황해도 수안 용현리에 일제의 동양척식회사 지배를 받지 않는 '자유의 토지' 위에 농장, 학교, 교회를 함께 운영하는 기독교 이상촌 건설을 추진했다. 이는 농민의 자급자족 경제와 생활 개선을 목표로 했다.
    • 수원 샘골 사업과 전략 전환: 최용신을 수원 샘골에 파견하여 농촌 계몽 운동을 지원했으나, YWCA의 재정 지원은 미미했고 3년 만에 중단되었다. 이후 YWCA는 직접적인 농촌 지원 대신, 1934년부터 농촌에 상주하며 공동체와 고락을 함께할 지역 지도자를 양성하는 '농촌부녀지도자수양소' 운영으로 전략을 전환했다.
  • 도시 여성 운동
    • 경성여자소비조합 (1930): 중간 상인의 이익을 배제하고 조합원들이 식료품과 일용품을 저렴하게 구매하게 함으로써, 여성들의 경제적 자립과 의식을 고취시키고자 한 경제 운동이었다. 이는 물산장려운동과 맥을 같이하는 민족 운동의 성격도 지녔으나 2년 만에 해체되는 한계를 보였다.
    • 가정부인친목회 (1933): 가정부인들의 생활 향상과 지식 계발을 목표로 조직되었다. 특히 당시로서는 파격적인 '부인 운동회'나 '여자수영강습회'를 개최하여, 가사와 육아에 얽매이기 쉬운 여성들에게 건강 증진과 사회 활동의 기회를 제공했다. 이는 건강한 어머니가 건강한 국민을 낳는다는 인식 아래, 여성 체육을 민족 운동의 기초로 본 시대적 흐름과 일치했다.

3. 해방기 여성 운동과 공창폐지

  해방 직후, 여성 단체들이 주도한 '공창폐지운동'은 단순히 성매매를 금지하는 것을 넘어, 신생 국가 건설의 중요한 과제로 인식되었다. 이 운동은 '여성 해방을 위한 운동이야말로 건국의 초석'이라는 기치 아래 전개되었으며, 여성 연대(solidarity)가 핵심 동력이었다.

  • 운동의 성격
    • 민족 보건 운동: 공창 제도를 성병, 특히 매독의 온상으로 규정하고, 이를 박멸하여 '순결한 민족'의 건강을 지키는 것을 최우선 목표로 삼았다.
    • 여성 주체의 '정화'와 '귀환': 여성 단체들은 성매매 여성을 신체적·정신적으로 '정화'시켜 사회와 가정으로 복귀시키는 것을 목표로 삼았다. 이는 남성의 조력 없이는 '국민'으로 인정받기 어려웠던 당시 여성의 현실을 반영한다.
  • 김말봉의 소설을 통해 본 복잡성
    • 『화려한 지옥』: 주인공 '채옥'이 공창폐지연맹의 도움으로 사회에 복귀하는 과정을 통해 운동의 이념을 보여준다. 채옥은 매독에 감염된 아이를 사산(死産)함으로써 '오염된 피'를 정화하고(신체적 정화), 누명을 쓰고 감옥에서 신앙을 통해 독립투사와 같은 숭고한 정신을 갖게 됨으로써(정신적 정화), '국민'으로 받아들여질 자격을 얻는다.
    • 『별들의 고향』: 공창폐지 문제를 둘러싼 해방 공간의 복잡한 이념 지형을 드러낸다.
      • 이념의 내적 분열: 사회주의(좌익)와 민주주의(우익) 모두 이상적 가치와 실제 실천 사이의 괴리를 보인다. 좌익 인물들은 폭력성과 사적 감정으로, 우익 인물들은 반공주의, 기독교주의, 가족주의가 뒤섞인 위선으로 이념적 한계를 드러낸다.
      • 이해관계의 교차: 공창폐지는 순수한 이념 투쟁이 아니라, 경제적 이익(포주 오덕수), 정치적 혼란 유도(좌익 백웅), 개인적 복수심(서녀 송난) 등이 얽힌 복합적인 문제였음이 폭로된다. 이는 당시 민정장관 안재홍이 경제적 이유로 공창폐지 유예를 주장했던 현실과도 맞닿아 있다.

II. 일제 강점기 신앙적 저항과 순교

  일제의 탄압이 극심해지던 시기, 특히 1930년대 이후 한국 교회는 신사참배 강요라는 거대한 시련에 직면했다. 이에 맞서 일부 교단과 개인들은 신앙의 순수성을 지키기 위해 조직적인 저항과 순교를 택했다.

1. 동아기독교의 조직적 저항

원산에 총부를 둔 동아기독교회는 말콤 펜윅 선교사의 영향을 받은 근본주의 및 세대주의 신학을 바탕으로 일제에 대한 비타협적 저항을 전개했다. 그리스도의 재림과 부활 신앙은 이들의 저항에 강력한 신학적 동력을 제공했다.

  • 포교규칙 거부 (1915): 교회를 일제의 행정 체계 아래 두려는 '포교규칙'에 따른 등록을 거부하며 정교분리의 원칙을 고수했다.
  • 일제 공교육 폐지 (1926): 펜윅 감목은 '달편지(月便紙)'를 통해, 내선일체와 황민화 교육을 목표로 하는 일제의 공교육을 거부하고 자체적인 '사설성경학원'을 운영할 것을 지시했다. 이는 교육을 통한 민족 정체성 말살 정책에 대한 정면 도전이었다.
  • 신사참배 거부 (1935): 김영관 감목은 달편지를 통해 황궁요배와 신사참배를 '우상숭배'로 명확히 규정하고, 이로 인한 어떠한 불이익도 감수할 것을 천명했다. 이는 장로교 총회가 1938년 신사참배를 가결한 것과 극명한 대조를 이룬다.
  • 강제 해체와 순교 (1942-1944): 지속적인 저항으로 '반국민 단체'로 규정된 동아기독교회는 1942년 '원산사건'으로 이종근 감목을 비롯한 지도자들이 대거 검속되었다. 이들은 치안유지법 위반으로 기소되었고, 결국 1944년 교단이 강제 해체되었다. 이 과정에서 전치규 목사 등 다수가 옥중 순교했다.

2. 개인적 저항과 수난

  교단 차원의 저항 외에도 많은 기독교 지도자들이 개인적인 신념과 활동으로 일제에 저항하다 고난을 겪었다.

  • 박형룡: 평양 숭실대학 재학 중 3·1 운동에 가담하여 일본 경찰에 체포되어 고초를 겪었다. 1920년에는 전도 활동 중 "천(하늘)의 검"(겔 33:6)이라는 제목의 설교가 문제가 되어 10개월간 옥고를 치렀다. 평양신학교 교수 시절에도 신사참배를 가결한 노회장이 심은 나무를 학생이 벤 사건에 연루되어 구금되는 등, 그의 생애는 일제에 대한 저항과 수난으로 점철되었다.
  • 김익두: 1938년 장로교 총회가 신사참배를 가결한 이후, 이를 거부하다 종로경찰서에서 한 달간 고초를 겪고 황해도 산골로 정배(定配)되었다. 1941년 신의주제일교회 부흥회 당시 일본 경찰에 의해 강제로 신사에 끌려갔으나, 머리를 숙이라는 강요에 맞서 하늘을 향해 버텼다고 전해진다. 경찰은 그가 참배했다고 허위 보고했으며, 이는 후일 큰 오해를 낳는 원인이 되었다.

III. 시대적 위기에 대한 영성적, 사상적 대응

  1930년대는 일제의 수탈과 압제가 극에 달하며 민족 전체가 깊은 좌절감에 빠져 있던 시기였다. 이러한 암울한 현실 속에서 일부 기독교 지도자들은 정치적 투쟁과는 다른 방식으로 시대의 아픔에 응답하며 새로운 영적, 사상적 길을 모색했다.

1. 이용도 목사의 부흥 운동

  이용도 목사는 1930년대 초반, 불꽃처럼 타올랐던 부흥사였다. 본래 열정적인 독립운동가였던 그는 폐병 3기 진단 이후 깊은 신비적 체험을 통해, 조국을 구원하는 길이 정치적 독립보다 '진리'를 통한 영적 갱신에 있음을 깨닫고 부흥 설교자로 변신했다.

  • 시대 진단: 그는 당시 한국 사회와 교회가 생명력을 잃고 제도화, 관료화되어가고 있다고 진단했다. 그는 "있어야 할 것이 없고, 없어져야 할 것으로 가득 찬" 교회의 현실을 통탄하며 새로운 부흥의 필요성을 절감했다.
  • 설교의 특징: 그의 설교는 눈물, 땀, 격정적인 몸짓으로 대표되는 열정적인 것이었다. 그는 설교를 통해 기존의 가치와 현실을 하나님의 말씀으로 '재묘사'하고, 교회와 성도들에게 새로운 정체성과 소명을 부여하고자 했다.
  • 신학 사상: 그의 신학은 그리스도와의 신비적 합일을 추구하는 열정주의적 성격을 띠었다. 그는 자신을 '주님의 신부'로 인식하며, 기도를 통해 그분과의 사랑의 관계를 심화시키고자 했다. 이러한 신비주의적 영성은 암울한 시대를 살던 사람들에게 강력한 영적 활력과 희망을 제공했다.

2. 김교신의 무교회주의와 사회 비평

  함석헌과 함께 우치무라 간조의 영향을 받은 김교신은 잡지 『성서조선』(1927-1942)을 통해 독자적인 신앙 노선을 걸으며 당대 사회와 교회를 날카롭게 비판했다. 그는 제도와 교리에 얽매인 '교회주의'를 비판하고 성경 중심의 신앙을 추구했다.

  • 우언(寓言)을 통한 비판: 김교신은 동물이나 사물에 빗대어 현실을 비판하는 우언적 글쓰기를 즐겨 사용했다.
    • 〈두더지의 사회〉: 지렁이를 죽이지도 살리지도 않고 말려 죽이는 두더지에 빗대어, 언론의 역할을 제대로 하지 못하는 신문사와 영적 생명력을 상실한 채 형식만 남은 교회를 비판했다.
    • 〈담뱃대〉: 러시아인들이 조선인의 담뱃대를 무기로 오해했다는 이야기를 통해, 수지타산과 합리성만으로는 이해할 수 없는 '신앙'과 '열정'의 힘을 역설했다. 이는 재정적 이익 없이 발행되는 『성서조선』을 의심하는 세태에 대한 자기변호이기도 했다.
    • 〈식목의 심리〉: 당장의 이익만 좇는 고리대금업과 벌목을 비판하며, 당대에는 이익이 없더라도 미래를 위해 나무를 심는 행위의 중요성을 강조했다. 이는 형제의 마음에 '복음의 나무'를 심는 기독교인의 사명과 연결되었다.
  • 신앙의 본질:
    • '질그릇에 담은 보화': 그는 인간을 본질적으로 연약하고 보잘것없는 '질그릇'에 비유했다. 인간의 가치는 스스로의 수양이나 노력에 있는 것이 아니라, 그 안에 담긴 '보화', 즉 예수 그리스도에게서 비롯된다고 보았다. 이는 인간의 자격이나 조건을 중시하는 기성 교권에 대한 근본적인 비판이었다.
    • '신앙이라는 렌즈': 신앙은 육안으로는 볼 수 없는 영적 세계를 보게 하는 '렌즈'와 같다고 설명했다. 과학적 도구를 통해 미시세계와 거시세계를 관찰하듯, 신앙이라는 도구를 통해서만 하나님의 섭리를 이해할 수 있다고 보았다.

IV. 신학적 대립과 정체성 확립

  일제 강점기와 해방기를 거치며 한국 교회, 특히 장로교 내에서는 신학적 노선을 둘러싼 갈등이 심화되었다. 이는 선교사들이 전수한 보수 신학을 고수하려는 흐름과, 새로운 서구 신학을 수용하고 한국적 신학을 모색하려는 흐름 사이의 대립으로 나타났다.

1. 보수-진보 신학 논쟁

  • 보수 정통주의: 박형룡
    • 신학적 입장: 박형룡은 프린스턴 신학교에서 J. G. 메이천의 영향을 받아, 성경의 무오성과 역사적 개혁신학을 수호하는 것을 필생의 과업으로 삼았다. 그는 자신의 신학을 '정통주의' 또는 '복음주의'로 칭하며, 이는 역사적 기독교 신앙의 계승임을 분명히 했다.
    • 자유주의 비판: 1935년 『기독교 근대 신학난제선평』을 출간하여, 슐라이어마허 이후의 자유주의 신학(신신학)과 칼 바르트의 위기신학(신정통주의)을 체계적으로 비판했다. 그는 자유주의 신학이 성경의 권위, 그리스도의 신성, 동정녀 탄생, 대속, 부활 등 기독교의 핵심 교리를 부정한다고 보았다. 김재준이 "이사야의 '알마'는 젊은 여자를 의미한다"고 주장하자, 이를 동정녀 탄생 교리를 약화시키는 시도로 보고 강하게 비판했다.
    • 변증학적 접근: 그는 신학의 모든 영역에 변증학적 방법을 적용하여, 공산주의, 사회주의, 진화론 등 당대의 반기독교적 사상에 대해 기독교적 답변을 제시하고자 했다.
  • 진보적 신학: 김재준
    • 신학적 입장: 김재준(장공)은 '성육신 신학'을 바탕으로, 신앙이 역사와 사회 현실에 깊이 참여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그는 고착된 교리주의를 비판하며 '신학함의 자유'를 강조했다.
    • 한신과 기장의 설립: 그의 신학 노선은 선교사 중심의 보수적인 평양신학교와 갈등을 빚었다. 1940년 설립된 '조선신학원'(후일 한신대학교)은 민족 자주적 신학교육과 신학적 자유를 목표로 했다. 이 갈등은 결국 1952년 김재준의 목사직 제명과 1953년 대한예수교장로회(기장) 총회의 설립으로 이어졌다.
    • 에큐메니컬 운동과 사회 참여: 기장 총회는 '노예적인 의존 사상을 배격'하고 '세계교회 정신에 철저'할 것을 선언하며 WCC에 가입했다. 이는 이후 한국 교회의 자립과 민주화, 인권 운동(민중신학)에 깊이 참여하는 신학적 토대가 되었다.

2. 주요 인물들의 신앙적 노선과 논란

  • 길선주: 1907년 평양대부흥운동의 주역으로, 그의 신학은 그리스도의 임박한 재림과 최후 심판을 강조하는 종말론적 성격이 강했다. 그는 세상을 '천국의 자민'과 '지옥의 자식'으로 이분화하며, 성도들에게 심판을 의식하는 경건한 삶을 촉구했다.
  • 김익두: 강력한 신유 은사로 유명했던 부흥사로, 그의 생애는 특히 말년에 대한 오해와 논란에 휩싸여 있다.
    • 신사참배 논란: 신의주에서 강제로 신사에 끌려갔으나 불참배로 저항했다는 주장과, 경찰의 허위 보고 및 친일파 목사들의 유언비어로 인해 참배자로 오해받았다는 해명이 존재한다.
    • 북한 정권 협력 논란: 해방 후 북한에서 '기독교도연맹' 총회장으로 추대되었으나, 이는 본인의 의사와 무관하게 강양욱 등에 의해 이름이 도용된 것이며, 실제로는 연맹 활동을 거부했다는 주장이 제기된다. 1949년 노동절 기념식 연설 또한, 실제로는 전도 설교였으나 방송국에서 김일성 찬양과 남한 비방 내용을 음성 대역과 편집을 통해 조작했다는 해명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