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제 말기(1930년대 후반-1945년) 일본 제국주의는 대륙 침략을 위한 국가 총동원 체제를 구축하면서, 한국 기독교를 포함한 사회 전반에 신사참배를 강요했다. 이는 단순한 종교적 압박을 넘어, '황국신민화 정책'의 핵심 수단으로서 한국인의 민족정신을 말살하고 일본에 완전히 동화시키려는 목적을 가졌다.
이러한 전방위적 압박에 대부분의 한국 교단은 굴복했다. 1936년 천주교를 시작으로 감리교 등 주요 개신교 교단이 신사참배를 수용했으며, 최후의 보루로 여겨졌던 장로교마저 1938년 제27차 총회에서 경찰의 감시 아래 신사참배를 "종교가 아닌 애국적 국가 의식"으로 규정하며 공식적으로 가결했다. 이후 한국 교회는 헌금으로 비행기와 기관총을 헌납하고, 교회 종을 전쟁 물자로 공출하는 등 적극적인 부일 협력의 길을 걸었다.
그러나 이러한 암흑기 속에서도 신앙의 순수성을 지키려는 소수의 저항은 계속되었다. 주기철 목사를 비롯한 신앙인들은 투옥과 고문, 순교를 감수하며 신사참배를 거부했고, 일부 장로교 계열 미션스쿨은 자진 폐교를 선택했다. 이들의 저항은 비록 소수였으나 일제의 탄압에 맞서 기독교 신앙의 본질을 지키려 한 중요한 운동으로 평가된다.
일제는 선교사 추방, 교파 강제 합동, 친일 신학교 설립 등을 통해 한국 교회를 완전히 통제하려 했으며, 해방 직전에는 옥중의 기독교 지도자들을 살해할 계획까지 세웠으나 8월 15일 해방으로 무산되었다. 신사참배와 부일 협력의 역사는 해방 이후 한국 교회의 분열과 정체성 갈등에 깊은 영향을 미친, 청산되지 않은 역사적 과제로 남아있다.
I. 배경: 신사참배 강요의 서막
1. 군국주의적 팽창과 사상 통제
일제는 1931년 만주사변, 1937년 중일전쟁, 1941년 태평양전쟁을 차례로 일으키며 대륙 침략을 본격화했다. 특히 중일전쟁 당시 난징대학살 사건(30만 명 학살)에서 보듯 극단적인 폭력성을 드러냈다. 이러한 침략 전쟁을 성공적으로 수행하기 위해 강력한 정신적 통제가 필요했고, '신사참배'는 그 핵심 수단이었다. 일본은 신사참배를 통해 천황 중심의 국가주의 이데올로기를 주입하고, 한반도를 대륙 침략의 안정적인 병참 기지로 만들고자 했다.
2. 황국신민화 정책
1930년대 이후 일제는 '내선일체(內鮮一體)'와 '황국신민화(皇國臣民化)' 정책을 강화했다. 이는 조선인을 일본 천황의 신하 된 백성으로 완전히 동화시키려는 정책으로, 다음과 같은 조치들이 포함되었다.
- 신사 도입: 1918년부터 한반도에 신사를 도입하기 시작해 1925년에는 서울 남산에 조선신궁을 건설했다.
- 황국신민서사 제창: 모든 공식 석상과 학교에서 "황국신민의 맹세"를 암송하도록 강요했다.
- 창씨개명: 1939년, 한국식 성명을 일본식으로 바꾸도록 강요했다.
- 국가총동원령: 1938년 공포되어 인력과 물자를 전쟁에 총동원하는 전시 체제를 구축했다.
II. 기독교계에 대한 전방위적 압박
1. 학교를 향한 압박
일제는 미래 세대의 사상을 통제하는 것이 가장 효과적이라고 판단하고 학교에 먼저 신사참배를 강요했다.
- 평남 교장 회의 (1935): 평안남도지사가 공사립학교 교장 회의를 소집하며 회의 전 평양신사 참배를 요구했다.
- 미션스쿨의 저항과 굴복
- 장로교: 숭실학교(맥쿤 교장)와 숭의여중(스누크 교장) 등은 신앙적 이유로 신사참배를 단호히 거부했고, 교장 파면 등 지속적인 압박 끝에 1937년 자진 폐교를 신청했다. 이외에도 세브란스 의전, 정신여학교, 광주의 숭일·수피아, 전주의 신흥·기전여중 등 다수의 장로교 계열 학교가 폐교를 선택했다.
- 감리교 및 캐나다 선교회: 학교를 존속시키는 것이 더 중요하다고 판단하여 신사참배를 수용했다.
- 조선어 교육 금지: 1938년 '조선교육령' 개정으로 학교에서 조선어 교육을 전면 금지시켰다.
- 신학교 탄압: 평양신학교 학생들은 노회가 신사참배를 결의하자 이에 반발하며 거부 운동을 계획했으나, 박형룡 교수와 주모 학생들이 입건되는 등 탄압을 받았다. 결국 평양신학교는 1938년 9월 무기한 자진 휴교에 들어갔다.
2. 교회를 향한 압박
1937년 중일전쟁 이후 교회에 대한 압박은 더욱 노골적이고 체계적으로 변했다.
- 1면 1신사 정책: 면(面) 단위 마을마다 신사를 하나씩 세우도록 강요했다.
- 가정 내 신사 설치: 각 가정에 '신궁대마(神宮大麻)'라는 부적을 넣은 간이 신사를 설치하고 참배를 강요했다.
- 동방요배: 매일 정해진 시간에 일본 천황이 있는 동쪽을 향해 절하도록 강요했다.
III. 한국 교회의 공식적 굴복과 부일 협력
1. 교단별 신사참배 수용
일제의 강압이 거세지자 한국의 주요 교단들은 차례로 신사참배를 수용했다.
| 교단 | 수용 시기 | 주요 내용 |
| 로마 가톨릭 | 1936년 | 교황 피우스 12세가 신사참배를 "종교 의식이 아닌 국가 의식"으로 규정하며 허용. |
| 안식교, 성결교, 구세군, 성공회, 감리교 | 1936년 6월 | 공식적으로 신사참배를 국가 의식으로 인정하고 수용. |
| 대한예수교장로회 | 1938년 9월 10일 | 제27차 총회에서 경찰 100여 명이 총대들을 감시하는 살벌한 분위기 속에서 신사참배를 공식 결의. |
장로교 총회는 다음과 같은 성명서를 통해 굴복을 공식화했다.
“아등(我等)은 신사는 종교가 아니고 기독교의 교리에 위반되지 않는 본의를 이해하고 신사참배가 애국적 국가의식임을 자각하여 이에 신사참배를 솔선 여행하고 추히 국민정신 총동원에 참가하여 비상 시국하에서 총후 황국신민으로서 적성을 다하기로 함”
총회 직후 부총회장 김길창을 포함한 총대 23명은 평양신사로 직행하여 참배함으로써 결의를 실행에 옮겼다.
2. 적극적 부일 협력
신사참배를 결의한 이후, 한국 교회는 일제의 전쟁 수행에 적극적으로 협력했다.
- 친일 단체 결성: "국민정신 총동원 조선 예수교 장로회 연맹" (1939) 등을 결성하여 조직적으로 협력했다.
- 전쟁 물자 헌납:
- 국방헌금: 장로교는 3년간 158만 원의 국방헌금을 모금했다.
- 무기 헌납: 성금을 모아 '조선장로호'라는 이름의 전투기 1대와 기관총 7정(15만 317원)을 헌납했다. 감리교 역시 '감리교단호'라는 이름의 전투기 3대 값을 헌납했는데, 이 과정에서 교회를 팔아 자금을 마련하기도 했다.
- 교회 종 공출: "금속 회수에 힘을 다하여 전선에 병기를 보내자"는 설교와 함께 교회의 종을 녹여 무기를 만드는 데 바쳤다.
- 신도(神道) 의식 참여:
- 미소기하라이(禊祓): 일부 목사들이 삼위일체 하나님의 이름으로 주는 세례를 버리고, 일본의 신 '천조대신'의 이름으로 세례(침례)를 받는 신도 의식에 참여했다. 이는 서울 한강, 부산 송도 등에서 거행되었다.
- 인력 동원: 징병제 실시에 협력하고, 각종 시국강연회를 통해 전쟁 참여를 독려했다.
IV. 소수의 저항과 순교
절대다수가 굴복하는 상황에서도 신앙의 순수성을 지키기 위한 저항은 멈추지 않았다.
1. 청원 운동
- 박관준 장로와 안이숙 선생: 국내에서의 청원이 효과가 없자 1939년 일본으로 건너가 제국의회 회의장에서 신사참배 강요 철회를 요구하는 건의서를 뿌리다 체포되었다. 박관준 장로는 옥고를 치르다 1945년 3월 순교했다.
- 김선두 목사: 일본 정계의 유력 인사들을 통해 신사참배 강요 중단을 요구했으나 실패하고 옥고를 치렀다.
2. 적극적 반대 운동
- 지도자: 서북지방에서는 주기철·이기선 목사가, 이남지방에서는 한상동 목사가 중심이 되어 반대 운동을 이끌었다.
- 운동 지침: 이들은 교인들에게 다음과 같은 구체적인 행동 강령을 제시했다.
- 신사참배를 우상숭배로 규정하고 죽음으로 거부할 것.
- 자녀를 신사참배 하는 학교에 입학시키지 말 것.
- 신사참배 하는 기존 교회에 출입하지 말 것.
- 참배를 거부하는 동지들끼리 가정예배를 드릴 것.
- 신앙 동지들끼리 신령한 교회를 육성할 것.
3. 주기철 목사의 순교
주기철 목사(1897-1944)는 신사참배 반대 운동의 상징적인 인물이다.
- 생애: 경남 창원 출신으로 오산학교에서 민족 교육을 받았고, 평양신학교를 졸업한 후 부산 초량교회, 마산 문창교회를 거쳐 평양 산정현교회에 부임했다.
- 저항: 그는 "내 설교권은 하나님께 받은 것이니 경찰서에서 하지 말라고 안 할 수는 없소"라며 일제의 설교 중단 압력을 거부했다. 일제는 그를 회유하기 위해 체포, 고문, 석방을 반복하는 잔인한 방식으로 7년여간 탄압했다.
- 마지막 설교: 옥에 갇히기 전 '오종목(五種目)의 나의 기원'이라는 제목으로 다섯 가지 소원을 기도했다.
- 죽음의 권세를 이기게 하소서.
- 장기간의 고난을 견디게 하소서.
- 노모와 처자와 교우들을 주님께 부탁합니다.
- 의에 살고 의에 죽게 하소서.
- 내 영혼을 주님께 부탁합니다.
- 순교: 1944년 4월 21일, 47세의 나이로 평양 형무소에서 순교했다.
V. 일제 말기 교회의 완전한 통제와 변질
1. 선교사 추방
일제는 선교사들을 자신들의 통치에 방해가 되는 '적성국가의 스파이'로 간주하고 추방 계획을 세웠다.
- 미국 정부의 철수 명령 (1940.10): 미일 관계가 악화되자 미국 정부는 주한 선교사들에게 완전 철수를 명령했다.
- 반전기도일 사건 (1941.3): 세계 기독교계가 함께 지킨 '전쟁 반대 기도일'을 유독 한국에서만 "반국가적 집회"로 문제 삼아, 이를 빌미로 남아있던 선교사들을 체포하고 추방했다.
- 마지막 철수: 1942년 4월, 언더우드 선교사의 아들 원한경(Horace G. Underwood Jr.)을 마지막으로 모든 선교사가 한국을 떠났다.
2. 교파 강제 합동
- 종교단체법 (1939): '한 도시에 한 교회만' 허용하는 법을 공포하여 교회를 조직적으로 통제했다.
- 교단 통합 시도: 1943년, 모든 교파를 하나로 합치려 했으나 구약성경 해석 문제 등 신학적 차이로 장로교와 감리교의 통합이 결렬되었다.
- 일본 기독교 산하 편입: 장로교는 '일본기독교 조선장로교단'으로, 감리교는 '일본기독교 조선감리교단'으로 재편되었다. 침례교, 성결교, 안식교 등 군소 교파는 해산 명령을 받았다.
- 최종 통합 (1945.7): 해방을 한 달 앞두고 모든 교단을 '일본조선기독교교단'이라는 이름으로 강제 통합하여 한국 교회의 명맥을 완전히 끊으려 했다.
3. 신학교의 변질
- 평양신학교 재개교 (1939): 자진 휴교했던 평양신학교를 친일 인사를 교장으로 세워 다시 열었으나, 기존의 정통성은 단절되었다. 이곳에서 목사들을 황국신민화 정책에 맞게 재교육했다.
- 조선신학교 개교 (1940): 김재준 목사 주도로 서울에 조선신학교(현 한신대학교 전신)가 개교했으나, 이곳 역시 신사참배를 해야만 운영이 가능했다.
4. 해방 직전의 암살 계획
일제는 패망이 임박하자, 자신들의 고문 만행을 은폐하기 위해 옥중에 있던 주기철, 한상동 등 기독교 지도자들을 1945년 8월 18일에 모두 살해할 계획을 세웠다. 그러나 3일 전인 8월 15일에 일본이 무조건 항복을 선언하면서 이 계획은 기적적으로 무산되었다.
'한국교회사' 카테고리의 다른 글
| 어둠 속의 촛불: 일제강점기, 신앙의 기로에 선 사람들 (0) | 2025.11.11 |
|---|---|
| 신앙의 등불, 주기철 목사 이야기 (0) | 2025.11.11 |
| 우리가 몰랐던 일제강점기 한국 교회의 3가지 충격적 진실 (1) | 2025.11.11 |
| 1920-1940년대 한국 기독교 지성과 사회 운동: 주요 인물과 쟁점 분석 (0) | 2025.11.04 |
| 일제강점기, 빛을 향한 그리스도인의 발걸음: 민족을 위한 사회운동 이야기 (0) | 2025.11.04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