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교회사

우리가 몰랐던 일제강점기 한국 교회의 3가지 충격적 진실

제이람 2025. 11. 11. 18:40

  "일제강점기 한국 교회"라고 하면 우리는 흔히 3.1운동의 선두에 서고, 민족의 아픔을 끌어안았던 저항의 이미지를 떠올립니다. 독립운동의 중심지이자 신앙의 절개를 지킨 순교자들의 이야기는 우리에게 깊은 감동과 자부심을 줍니다.

 

  하지만 역사의 기록은 우리가 가진 낭만적 이미지보다 훨씬 더 복잡하고 고통스러운 진실을 담고 있습니다. 특히 일제의 '신사참배' 강요 앞에서 한국 교회가 겪었던 시련의 민낯은 우리가 외면하고 싶을 만큼 아픈 역사입니다. 이 글은 그 시기 한국 교회의 역사에서 가장 놀랍고, 때로는 불편하게 다가올 수 있는 역사적 사실 세 가지를 짚어보고자 합니다.

1. 사실상 '모든' 교회가 무너졌다

  신사참배에 대한 저항은 주기철 목사와 같은 소수의 영웅적인 이야기로 남아있지만, 당시의 현실은 저항이 예외였고 굴복이 일반적이었습니다. 압도적인 다수의 교회가 일제의 강요 앞에 신앙의 절개를 꺾었습니다.

 

  구체적인 기록은 충격적입니다. 1936년 로마 가톨릭을 시작으로 안식교, 성결교, 구세군, 감리교, 성공회 등 대부분의 교파가 신사참배를 우상숭배가 아닌 '국가 의식'으로 받아들이며 수용했습니다. 가장 강력하게 저항할 것으로 기대됐던 장로교마저 1938년 제27차 총회에서 신사참배를 공식적으로 가결했습니다. 한 역사학자는 이 문제에 대해 "신사 참배 안 하면 문을 닫을 수밖에 없었기 때문에 신사 참배를 모든 교회가 했다라고 해도 무방하다"고 단언합니다.

 

  당시 장로회 총회에서 가결된 결의문은 한국 교회사의 가장 부끄러운 기록 중 하나로 남아있습니다.

 

  "아등은 신사는 종교가 아니고 기독교의 교리에 위반되지 않는 본의를 이해하고 신사참배가 애국적 국가의식임을 자각하여 이에 신사참배를 솔선 여행하고 추히 국민정신 총동원에 참가하여 비상 시국하에서 총후 황국신민으로서 적성을 다하기로함"

 

  이 사실이 중요한 이유는, 한국 교회의 역사가 단순한 영웅 서사가 아님을 보여주기 때문입니다. 이는 집단적인 연약함과 실패의 역사를 정직하게 인정하는 출발점이 되며, 과거를 미화하지 않고 교훈을 얻는 첫걸음입니다.

2. 단순한 굴복이 아닌, '적극적' 협력이었다

  교회의 변절은 단순히 압력에 못 이겨 마지못해 참배한 수준을 넘어, 일제의 전쟁 정책에 적극적으로 협력하는 단계까지 나아갔습니다. 이는 신앙 공동체가 어떻게 권력의 도구로 전락할 수 있는지를 보여주는 뼈아픈 증거입니다.

 

  전쟁 물자 헌납 교회는 "국민정신 총동원 조선 예수교 장로회 연맹"과 같은 조직을 결성하고, 국방 헌금을 모아 '조선창도호'라는 이름의 전투기를 헌납했습니다. 감리교 역시 '감리교단호'라는 이름의 비행기 값을 헌납하며 경쟁적으로 일제에 충성을 보였습니다. 이 경쟁은 충격적인 수준에 이르렀는데, 장로교가 성금을 모아 비용을 충당한 반면 감리교는 성금 모금은 물론 심지어 교회를 팔아서 돈을 마련하기까지 했습니다.

 

  교회 자원 수탈 전쟁 물자가 부족해지자 교회는 신자들에게 교회의 종이나 놋그릇, 심지어 문짝까지 떼어내 무기 제작에 사용하도록 독려했습니다. 예배당을 울리던 종소리는 전쟁의 광음을 부추기는 무기의 재료가 되었습니다.

 

  일본식 세례 거행 가장 충격적인 사례는 일부 목사들이 보인 신앙의 변질입니다. 이들은 성부, 성자, 성령의 이름이 아닌 일본의 신 '천조대신(天照大神)'의 이름으로 세례를 주는 '미소기하라이(禊祓)'라는 의식에 참여했습니다. 서울의 한강, 부산의 송도 앞바다 등에서 거행된 이 의식은 '새로운 일본식 기독교 건설'을 목표로 한 체계적인 계획의 일환이었으며, 신앙의 근간을 스스로 무너뜨린 행위였습니다.

 

  이러한 적극적 협력은 외부의 압력만으로는 설명할 수 없는, 신앙의 본질이 어떻게 왜곡되고 변질될 수 있는지를 보여주는 아픈 역사입니다.

3. 저항은 영웅적이었으나, 지독히 외로운 싸움이었다

  모두가 굴복하고 심지어 적극적으로 협력하는 상황 속에서, 신앙의 순수성을 지키려 했던 이들의 저항은 상상 이상으로 고독하고 힘겨운 싸움이었습니다. 그 대표적인 인물이 바로 주기철 목사입니다.

 

  주기철 목사의 가장 큰 고통은 일본 경찰의 잔인한 고문만이 아니었습니다. 그를 더 힘들게 한 것은 "왜 너만 유별나게 구느냐"며 회유하고 압박하던 동료 목사들과 교단의 등이었습니다. 모두가 '하나님의 뜻'이라며 신사참배를 합리화할 때, 혼자 '아니오'라고 외치는 것은 모든 관계가 단절되는 것을 의미했습니다.

 

  경찰이 그의 설교를 금지했을 때, 그는 신앙인의 양심이 무엇인지 보여주는 유명한 말을 남겼습니다.

"나는 설교권을 하나님께 받은 것이니 하나님이 하지 말라고 하면 그만 둘 것이요, 내 설교권을 경찰에서 받은 것이 아닌 즉 경찰서에서 하지 말라고 한다고 안할 수는 없소"

 

  그의 마지막 설교 중 하나였던 '오종목의 나의 기원'에서 그는 "장기간의 고난을 견디게 하여 주옵소서"라고 기도했습니다. 여기서 '장기간의 고난'은 단순한 표현이 아닙니다. 일제는 주기철 목사를 회유하기 위해 악랄한 심리적 고문을 가했습니다. 그를 죽기 직전까지 고문한 뒤 풀어주어 가족의 품으로 돌려보냈습니다. 집에서 아내의 간호와 자녀의 온기를 느끼며 몸이 회복될 즈음, 일제는 그를 다시 체포해 고문을 재개했습니다. 이 끔찍한 순환을 몇 년에 걸쳐 반복하며 인간의 의지를 파괴하려 했던 것입니다. 한 걸음만 양보하면 모든 고통이 끝날 수 있다는 유혹 속에서, 그의 기도는 한 인간의 처절한 외침이자 위대한 신앙 고백이었습니다.

 

  주기철 목사의 저항은 한 개인의 위대함을 넘어, 진정한 신앙이 무엇인지, 그리고 다수가 틀렸을 때 '아니오'라고 말하는 것이 얼마나 큰 용기를 필요로 하는지를 보여주는 역사적 교훈으로 남아있습니다.

 

  일제강점기 말기, 한국 교회는 전면적으로 굴복했고, 적극적으로 협력했으며, 소수의 저항은 지독히 고독했습니다. 이 어둡고 부끄러운 역사를 기억하는 것은 단순히 과거를 비난하기 위함이 아닙니다.

 

  한 역사가는 "우리는 항상 신사참배를 했던 백성이다"라고 말했듯, 이 역사를 통해 우리는 교만 대신 겸손을, 영웅주의 대신 성찰을 배워야 합니다. 과거의 실패를 정직하게 마주할 때만이 같은 실수를 반복하지 않을 힘을 얻을 수 있습니다.

 

  마지막으로 스스로에게 질문을 던져봅니다. 만약 오늘날 우리 사회와 신앙 공동체에 비슷한 형태의 압력이 온다면, 우리는 과연 다를 것이라고 장담할 수 있을까? 이 질문에 대한 답을 찾는 것이 바로 우리가 역사를 배우는 이유일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