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교회사

어둠 속에서 다시 세운 신앙: 해방과 전쟁, 한국 교회의 재건 이야기

제이람 2025. 11. 18. 13:11

기쁨과 분열의 교차로에 선 한국 교회

  1945년 8월 15일, 해방의 함성은 축복이었지만, 그 메아리는 곧 닥쳐올 분열과 시련의 서곡이었습니다. 길고 어두웠던 일제강점기의 터널을 빠져나온 기쁨은 잠시, 곧이어 38선을 경계로 남과 북이 나뉘는 냉엄한 분단의 현실이 눈앞에 닥쳤습니다.

 

  이러한 혼란 속에서 한국 교회는 시급한 과제를 안고 있었습니다. 일제 말기, 신사참배 강요와 교단 통폐합 정책으로 교회는 "철저하게 농락당하고 무너졌기" 때문입니다. 무너진 신앙의 기둥을 바로 세우고 찢어진 교회를 다시 깁는 '재건'의 길은 북과 남에서 서로 다른 방식으로, 그러나 똑같이 험난하게 시작되었습니다. 이것은 해방과 전쟁이라는 거대한 역사의 소용돌이 속에서 신앙을 지키고 교회를 다시 세우려 했던 사람들의 이야기입니다.

1부: 북한, 짧은 희망과 공산 정권과의 충돌

1.1. 감옥에서 나온 성도들, 재건의 깃발을 들다

  해방의 소식과 함께 가장 먼저 자유를 찾은 이들 중에는 신사참배에 저항하다 감옥에 갇혔던 성도들이 있었습니다. 일제에 의해 투옥된 70여 명의 신앙 동지들 중 혹독한 고문과 억압을 이겨내고 살아남은 이는 한상동, 이기선 목사 등을 포함한 약 20여 명에 불과했습니다. 이 '출옥 성도'들은 살아있는 순교의 상징이었습니다.

 

  이들은 감옥에서 풀려나자마자 순교한 주기철 목사가 시무했던 평양 산정현교회에 모였습니다. 그리고 앞으로 한국 교회를 어떻게 바로 세울 것인지 두 달간 함께 기도하며 깊은 고민에 빠졌습니다. 당시 대형 교회를 이끌던 목회자 대부분이 이미 신사참배에 참여했기에, 소수였지만 출옥 성도들의 목소리에 한국 교회 전체가 주목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1.2. 회개를 위한 원칙: '통회와 자복'

  1945년 9월 20일, 출옥 성도들은 마침내 교회를 바로 세우기 위한 다섯 가지 기본 원칙을 발표했습니다. 그 내용은 다음과 같습니다.

  • 교회 지도자들은 모두 신사에 참배했으니, 권징의 길을 따라 통회하고 정화된 후에 교역에 나아가야 한다.
  • 권징은 스스로 책망하고 조심하는 자책과 자숙의 방법으로 하되, 목사는 최소 2개월간 휴직하고 통회하며 자복해야 한다.
  • 목사와 장로가 휴직하는 동안에는 집사나 평신도가 예배를 인도한다.
  • 이 재건 원칙을 한국의 모든 노회와 교회에 전달하여 일제히 실행하도록 한다.
  • 교역자 양성을 위해 신학교를 복구하고 재건한다.

  이 원칙의 핵심은 두 번째 항목, 즉 신사참배에 가담했던 목회자들에게 '2개월간의 휴직과 통회 자복'을 요구한 것이었습니다. 이는 단순한 처벌이 아니라, 무너진 신앙의 양심을 회복하고 교회의 거룩함을 되찾기 위한 최소한의 정화 과정이었습니다.

1.3. 내부의 갈등: "우리도 교회를 지키느라 고생했다"

  그러나 회개와 정화를 향한 첫걸음은, 교회를 지켰다는 명분 아래 숨어 있던 내부의 저항이라는 거대한 암초에 부딪혔습니다. 1945년 11월, 평북 6개 노회가 연합하여 개최한 교역자 수련회에서 갈등이 터져 나왔습니다. 강사로 나선 출옥 성도 측의 이기선 목사와 박형룡 교수가 교회 재건 원칙을 설명하자, 신사참배에 앞장섰던 홍택기 목사 등 친일 목회자들이 강하게 반발했습니다.

 

  홍택기 목사는 자신들의 행동을 이렇게 변호했습니다.

 

  "옥중에서 고생하는 사람이나 교회를 지키기 위해 고생하는 사람이나 그 고생은 마찬가지였고... 교회를 등해지고 일제 강제에 할 수 없이 굴한 사람의 수고가 더 높이 평가되어야 한다."

 

  이 논리는 일제 부역을 '교회를 지키기 위한 현실적 수고'로 둔갑시켜, 참된 회개를 가로막는 위험한 자기 합리화였습니다. 이는 이후 한국 교회가 사회적 책임의 문제 앞에서 오랫동안 해결하지 못한 갈등의 씨앗을 심는 순간이었습니다.

 

  이 첨예한 대립은 결국 황해도, 평안도, 함경도의 5개 도가 연합하여 '5도 연합노회'를 결성하고, '2개월 근신'을 결정하는 선에서 봉합되었습니다. 하지만 진정한 회개와 완전한 일치를 이루지 못한 채 남겨진 갈등의 불씨는 북한 교회의 미래에 어두운 그림자를 드리웠습니다.

1.4. 공산 정권과의 정면충돌: '주일 성수' 문제

  1945년 8월 24일 소련군이 평양에 입성하면서 북한의 상황은 급변했습니다. 공산 정권은 '5도 인민위원회'를 조직해 북한 지역을 장악하고, 김일성의 외삼촌인 강양욱 목사를 중심으로 '북조선 기독교도 연맹'을 만들어 교회를 자신들의 통제하에 두려 했습니다.

 

  교회와 공산 정권의 갈등이 폭발한 것은 1946년 11월 3일, 주일에 실시된 인민위원회 선거 때문이었습니다. 신사참배의 굴욕으로 한번 무너졌던 신앙의 보루를 다시는 내어줄 수 없다는 절박함이 저항의 불길을 지폈습니다. 공산 정권은 투표율을 높이기 위해 교회를 선거 장소로 이용하려 했고, 이는 교회가 신앙의 원칙을 걸고 맞서야 하는 '제2의 신사참배'와도 같았습니다.

 

  교회는 '평양신앙동지회'를 중심으로 조직적인 반대 운동에 나섰습니다. 이들은 신앙의 원칙을 분명히 하고자 다음과 같이 결의했습니다.

 

  "성수 주일은 생명처럼 지켜야 하며, 정치와 종교는 엄격히 구분되어야 하고, 교회당의 신성은 반드시 확보되어야 한다." 이들은 주일 선거에 참여하지 말 것을 교인들에게 권면했고, 투표 당일에는 새벽부터 밤늦게까지 교회에 모여 예배를 드렸습니다. 이 사건은 공산 정권이 기독교를 본격적으로 탄압하는 결정적인 계기가 되었습니다.

1.5. 신학교의 수난과 지하 교회

  공산 정권의 탄압은 신학교로까지 이어졌습니다. 5도 연합노회가 재건을 추진하던 평양신학교의 교장으로 임명된 김인준 목사는 기독교도 연맹 가입을 거부하다가 정치 보위부에 연행되어 고문 끝에 순교했습니다.

 

  이후 공산 정권은 장로교의 평양신학교와 감리교의 성화신학교를 '기독교신학교'라는 이름으로 강제 통합시켰습니다. 연맹 서기이자 강양욱의 심복이었던 조택수는 평양신학교 현관에 김일성 초상화를 걸어놓고, 신학생 한 명 한 명을 개인 면담하며 사상 검증을 실시했습니다. 이 살벌한 과정을 통해 800여 명(평양신학교 600명, 성화신학교 200명)에 달하던 신학생 중 공산주의에 협조적인 60여 명만 남기고 모두 축출하는 비극이 벌어졌습니다.

 

  더 이상 공개적으로 신앙을 지킬 수 없게 된 북한의 교회는 결국 모든 활동을 멈추고 어둠 속으로 숨어들어야 했습니다. 수많은 기독교인들이 인민재판으로 목숨을 잃었고, 북한 교회는 기나긴 '지하 교회'의 시대로 접어들게 되었습니다. 이처럼 북녘의 교회가 공산 정권의 탄압 아래 신음하는 동안, 남한의 교회는 또 다른 형태의 어려움 속에서 재건의 길을 모색하고 있었습니다.

2부: 남한, 분열된 현실 속에서의 재건

2.1. 첫걸음의 실패: 친일파 문제

  해방 직후인 1945년 9월 8일, 서울 새문안교회에서는 일제 말기 모든 교단을 통합했던 '일본 기독교 조선교단'의 후신인 '조선기독교교단 남부대회'가 열렸습니다. 하지만 이 대회를 이끌어가는 임원들이 대부분 친일 부역자들이었기에 교인들의 신뢰를 얻지 못했습니다. 결국 이 첫 재건 시도는 내부의 불신을 극복하지 못하고 실패로 돌아갔습니다.

2.2. 교단별 재건의 길

  이후 남한의 주요 교단들은 각자의 방식으로 재건을 추진했습니다. 그 과정은 아래 표와 같이 요약할 수 있습니다.

교단 주요 특징 핵심 결과
장로교 - 손양원, 한상동 목사 등이 속한 경남노회가 재건 운동을 주도함
- 친일파들이 여전히 교권을 장악하고 있었음.
- 1946년 남부대회에서 신사참배 결의를 '취소'했음.
- 이는 '회개'가 아닌 '취소'라는 법적 조치에 그쳐, 친일 협력이라는 더 깊은 도덕적, 영적 성찰을 회피한 절반의 재건이라는 한계를 남겼습니다.
감리교 - 신앙의 절개를 지킨 젊은 목회자 중심의 '재건파'(Reconstruction Faction)와 기존 교권을 쥔 친일 중심의 '복흥파'(Revival Faction)가 극심하게 대립함.
- 감독회장직을 둘러싼 갈등이 치열했음.
- 양측의 갈등 끝에 1949년 '연합 연회'를 구성하며 분열을 극복하고 하나의 감리교로 다시 시작함.
기타 교단 - 성결교회: 교단 신학교인 경성신학교를 '서울신학교'로 개명함.
- 침례교: '동아기독교'에서 본래 이름으로 개명하고, 미국 남침례교단과 연대하며 성장의 발판을 마련함.
- 구세군: '구세교회'로 이름을 바꿀지 논의했으나, 투표를 통해 '구세군'이라는 원래 이름을 유지하기로 결정함.

 

  이처럼 내부의 갈등과 분열을 겪으며 힘겹게 교회를 재건하던 남한 사회는, 곧이어 민족 전체를 비극으로 몰아넣은 거대한 전쟁을 마주하게 됩니다.

3부: 새로운 국가, 그리고 6.25 전쟁의 시련

3.1. 기독교 국가를 꿈꾸다

  해방 후 대한민국 정부 수립 과정에서 기독교는 막대한 영향력을 발휘했습니다. 당시 많은 지도자들은 기독교 정신에 기반한 국가 건설, 즉 '기독교 국가론'을 꿈꾸었습니다. 이러한 주장이 힘을 얻었던 배경은 다음과 같습니다.

  1. 미국을 통한 해방: 기독교 국가인 미국에 의해 해방되었다는 인식이 강했습니다.
  2. 민주주의의 기초: 기독교가 민주주의의 기초를 제공한다는 믿음이 있었습니다.
  3. 지도자들의 성향: 이승만을 비롯한 정치, 사회 지도자 다수가 기독교인이거나 기독교에 호의적이었습니다.
  4. 북한 공산주의에 대한 위기감: 무신론을 앞세운 북한 공산주의에 맞서기 위해 기독교가 강력한 이념적 대안으로 여겨졌습니다.

  이러한 분위기 속에서 1948년 초대 국회 개원식은 감리교 목사의 기도로 시작되었고, 이승만 대통령 역시 취임식에서 하나님 앞에 선서했습니다. 당시 초대 국회의원의 21%, 제1공화국 행정부 장차관급의 38%가 개신교인이었을 정도로 기독교의 위상은 높았습니다.

3.2. 6.25 전쟁과 교회의 희생

  그러나 1950년 6월 25일, 민족의 비극인 6.25 전쟁이 발발했습니다. 전쟁 초기, 공산군은 점령지에서 수많은 목회자와 성도들을 인민재판을 통해 학살하거나 북으로 납치해 갔습니다. 특히 "같은 민족인데 괜찮을 것"이라 생각하며 피난을 가지 않고 교회를 지키려 했던 많은 지도자들이 이때 희생되었습니다. 교회는 민족의 아픔과 함께 가장 큰 고통을 겪어야 했습니다.

3.3. 사랑의 원자탄, 손양원 목사

  6.25 전쟁의 비극 속에서 한국 교회의 순교 신앙을 상징하는 인물이 있습니다. 바로 '사랑의 원자탄'이라 불리는 손양원 목사입니다.

 

  그의 원수를 향한 사랑은 하루아침에 나타난 것이 아니었습니다. 그는 학창 시절부터 천황에게 절하는 '동방요배'를 거부하여 퇴학당할 정도로 불의와 타협하지 않는 신앙을 가졌습니다. 또한 목회자가 된 후에는 한센병 환자들이 모여 사는 애양원교회에 부임하여, 간호사들조차 꺼리는 중환자실에 맨손으로 들어가 상처를 닦아주고 그들을 껴안고 기도할 만큼 자기희생적인 사랑을 실천해왔습니다. 원수를 향한 그의 용서는 이처럼 급진적인 사랑으로 점철된 삶의 정점이었습니다.

 

  1948년 여순사건 당시, 그는 사회주의 폭도들에 의해 두 아들(동인, 동신)을 한꺼번에 잃는 아픔을 겪었습니다. 그러나 그는 두 아들의 장례식에서 오히려 하나님께 '아홉 가지 감사'를 드려 모두를 놀라게 했습니다.

  • 나 같은 죄인의 혈통에서 순교의 자식들이 나오게 하셨으니 하나님께 감사합니다.
  • 미국 유학 가려고 준비하던 내 아들, 미국보다 더 좋은 천국으로 갔으니 내 마음 안심되어 하나님 감사합니다.
  • 나의 사랑하는 두 아들을 총살한 원수를 회개시켜 내 아들로 삼고자 하는 사랑의 마음을 주신 하나님께 감사합니다.

  더욱 놀라운 것은, 두 아들을 죽인 원수 안재선이 체포되어 사형당하게 되자 그를 위해 탄원하여 살려내고, 자신의 양자로 삼은 일이었습니다. 원수마저 사랑으로 품은 그의 삶은 기독교 사랑의 정수를 보여주었습니다. 손양원 목사는 6.25 전쟁이 터졌을 때도 피난을 거부하고 한센병 교인들을 끝까지 지키다가, 1950년 9월 28일 공산군에 의해 총살당하며 순교했습니다. 그의 삶은 고난 속에서도 신앙이 어떻게 빛날 수 있는지를 보여주는 영원한 증표로 남았습니다.

3.4. 전쟁의 상처를 보듬은 세계의 손길

  전쟁은 남한 인구 2,100만 명 중 전재민 402만 명, 피난민 380만 명을 낳는 등 참혹한 상처를 남겼습니다. 고아와 전쟁 미망인(약 30만 명)이 넘쳐났고, 사회 전체가 폐허 위에서 신음했습니다.

 

  이때 '기독교세계봉사회(CWS)'를 비롯한 전 세계 기독교 단체들이 한국을 돕기 위해 발 벗고 나섰습니다. 이들의 구호 활동은 절망에 빠진 한국 사회에 큰 희망이 되었습니다.

  • 구호 물품 지원: 미국에서 모금 운동을 펼쳐 의류, 식량 등 구호 물품을 보냈습니다.
  • 아동 구호 사업: 수많은 고아원을 운영하고 해외 입양을 주선하여 전쟁고아들을 돌보았습니다.
  • 전쟁 미망인 지원: 남편을 잃은 여성들을 위한 지원 사업을 펼쳤습니다.
  • 문서 및 방송 선교: '생명의 말씀사'(1953)와 '극동방송국'(1956)을 설립하여 전쟁으로 피폐해진 사람들의 마음에 복음의 씨앗을 심었습니다.

  전쟁의 잿더미 위에서, 한국 교회는 외부의 도움과 내부의 희생을 바탕으로 새로운 부흥의 시대를 준비하게 됩니다.

아픔을 딛고 선 한국 교회의 유산

  해방 직후부터 6.25 전쟁에 이르기까지, 한국 교회는 짧은 기간 동안 북한의 공산주의 탄압, 남한의 친일 문제로 인한 내부 갈등, 그리고 민족 전체의 비극인 전쟁이라는 거대한 시련을 온몸으로 겪어냈습니다.

 

  이 고통스러운 역사는 오늘날 한국 교회에 깊은 유산을 남겼습니다. 북한의 김인준 목사 순교와 주일 선거 저항에서 시작된 처절한 투쟁은 남한 교회에 단순한 이념이 아닌, 생존과 순교의 기억이 각인된 강력한 반공주의를 유산으로 남겼습니다. 대한민국 건국 과정에서 이승만 대통령과 기독교 지도자들이 꿈꿨던 '기독교 국가론'은, 이후 교회가 국가와 긴밀한 관계를 맺으며 때로는 예언자적 목소리를 잃고 권력과 가까워지는 역사의 출발점이 되었습니다. 그리고 이 모든 과정의 바탕에는 아직도 끝나지 않은 남북 분단의 아픔이 자리하고 있습니다. 이 시기를 되돌아보는 것은 단순히 과거를 아는 것을 넘어, 현재 한국 교회의 모습을 이해하고 미래를 성찰하는 중요한 첫걸음이 될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