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교회사

1950년대 한국 장로교 대분열: 원인과 과정에 대한 심층 분석 보고서

제이람 2025. 11. 25. 17:26

I. 해방 이후 한국 장로교, 분열의 서막

  해방 직후 한국 사회는 새로운 국가 건설의 희망과 함께 이념적 대립과 혼란이라는 거대한 격변을 마주하고 있었습니다. 이러한 시대적 상황 속에서 한국 교회, 특히 장로교는 일제강점기 신사참배 문제의 후유증을 온전히 청산하지 못한 채 깊은 내홍을 겪고 있었습니다. 여기에 잠재되어 있던 신학적 노선의 대립이 표면화되고, 동족상잔의 비극인 6.25 전쟁이 발발하면서 교회 내 갈등은 더욱 증폭되었습니다. 결국 1950년대 한국 장로교는 회복과 부흥이 아닌 분열이라는 비극적 역사의 소용돌이로 빠져들게 되었습니다.

 

  본 보고서는 1950년대에 발생한 한국 장로교의 세 가지 결정적 분열—고려파(高麗派), 기장(기독교장로회)파, 그리고 통합과 합동—을 중심으로 각 사건의 신학적, 정치적, 역사적 원인을 다각적으로 심층 분석하고자 합니다. 이를 통해 복잡하게 얽힌 한국 장로교 분열의 지형도를 입체적으로 이해하고, 그 역사적 유산이 오늘날 한국 교회에 미치는 영향을 고찰하는 것을 목표로 합니다.

 

  본론에서 가장 먼저 다룰 고려파 분열의 핵심 쟁점은 일제강점기 신앙의 정체성을 뒤흔들었던 신사참배 문제의 청산 과정에서 비롯되었습니다. 이는 분열의 역사가 단순한 교권 다툼이 아닌, 신앙의 본질을 둘러싼 치열한 고민에서 시작되었음을 보여줍니다.

II. 첫 번째 분열: 고려파(高麗派) 분열 (1951) - 신앙 순결성의 대립

  고려파 분열은 해방 이후 한국 장로교가 직면한 첫 번째 중대 도전으로, 교회의 역사적 과오 청산 능력을 시험하는 시금석이었습니다. 이는 단순한 교권 다툼을 넘어, 식민 잔재를 청산하고 신앙의 순결성을 회복하려는 열망이 기존 교권 구조와 충돌하며 발생한 필연적 갈등이었습니다. 이 사건은 교회가 과거사 문제에 대한 내부 정화에 실패하며 결국 분열이라는 선례를 남겼다는 점에서 중대한 역사적 의미를 지닙니다.

분열의 배경 분석

1. 신사참배 문제와 출옥성도

  분열의 가장 근본적인 원인은 신사참배 문제였습니다. 일제에 항거하여 신사참배를 거부하고 옥고를 치른 '출옥성도(出獄聖徒)' 들은 해방 후 교회의 정화와 개혁을 강력히 요구했습니다. 이들을 주도한 인물은 한상동 목사였습니다. 반면, 당시 교단의 다수파와 교권은 일제에 협력했던 이른바 '친일파' 목회자들이 장악하고 있었습니다. 신앙의 순결성을 최우선으로 삼은 출옥성도 그룹과 기존의 기득권을 유지하려던 다수파 간의 갈등은 피할 수 없는 것이었습니다.

2. 고려신학교 설립

  출옥성도 그룹은 기존의 조선신학교가 신학적으로 자유주의 경향을 띤다고 판단하고, 정통 보수 신학을 교육할 새로운 기관의 필요성을 절감했습니다. 이에 한상동 목사가 주도적 역할을 맡아, 만주에서 귀국한 성경신학자 박윤선 박사를 중심으로 1946년 부산에서 고려신학교를 개교했습니다. 그러나 이 신학교는 총회의 공식적인 인준 없이 경남노회를 중심으로 설립되었다는 점에서 총회 다수파와의 갈등을 예고하는 불씨가 되었습니다.

갈등의 전개 과정

1. 신학교를 둘러싼 갈등

  1947년, 김재준 목사가 이끌던 조선신학교의 신학 노선에 반대한 51명의 학생들이 진정서를 제출하는 '조선신학교 51인 진정서 사건' 이 발생했습니다. 이 사건은 고려신학교의 설립 명분을 입증하는 강력한 촉매제가 되었습니다. 진정서를 제출한 보수 신앙의 학생들이 대거 고려신학교로 합류하면서, 고려신학교는 총회 다수파에게 실질적인 위협으로 부상했습니다. 이후 고려신학교는 한국 보수 신학의 상징적 인물이었던 박형룡 박사를 교장으로 영입하며 정통성을 강화하려 했습니다.

 

  하지만 총회 다수파는 출옥성도 세력의 구심점이 된 고려신학교를 견제하려는 의도를 분명히 했습니다. 결국 1949년 제35차 총회에서 고려신학교는 총회 직영 신학교로 불인준되었습니다. 이는 출옥성도 그룹에게 큰 충격을 주었으며, 총회와의 감정의 골을 깊게 만들었습니다.

2. 경남노회 분열 사태

  갈등은 신학교 문제를 넘어 노회 차원으로 번졌습니다. 한상동 목사의 거점이었던 경남노회는 '친일파'와 '출옥성도' 세력으로 양분되어 극심하게 대립했습니다. 결국 양측이 서로를 인정하지 않으면서 두 개의 경남노회가 등장하는 초유의 사태가 발생했습니다.

 

  이 문제는 1950년 제36차 총회에서 폭발했습니다. 양측이 서로 정통성을 주장하며 총회에 총대를 파송하자, 총회는 극심한 분란에 휩싸였습니다. 회의는 고성과 다툼으로 아수라장이 되었고, 급기야 질서 유지를 위해 경찰까지 동원되는 사건으로 비화되며, 총회의 절차적 정당성과 영적 권위는 회복 불가능한 수준으로 실추되었습니다. 이로 인해 총회는 정상적인 진행이 불가능해졌고, 6.25 전쟁 발발로 인해 장기 정회에 들어갔습니다.

결과 및 의의 평가

  6.25 전쟁으로 연기되었던 총회는 1951년 5월 부산에서 속개되었습니다. 이 총회에서 결국 기존 교권을 장악하고 있던 다수파 측의 경남노회가 정통성을 인정받았습니다. 더 이상 총회 내에서 자신들의 뜻을 관철할 수 없다고 판단한 한상동 목사 측은 총회를 탈퇴하여 '고려파 장로교회' 를 조직함으로써 분열은 공식화되었습니다.

 

  고려파 분열은 한국 장로교 분열사의 비극적인 시작이었지만, 동시에 일제의 잔재를 청산하고 신앙의 순결성을 지키려 했던 저항의 결과물이라는 점에서 중요한 역사적 의의를 가집니다.

 

  고려파가 '신앙의 순결성'을 문제 삼았다면, 곧이어 발생한 기장파 분열은 교회가 자신의 '신학적 정체성'을 어떻게 규정할 것인가를 둘러싼 더욱 첨예한 이념적 대립이었습니다.

III. 두 번째 분열: 기장(기독교장로회)파 분열 (1953) - 신학적 자유주의와 보수주의의 충돌

  기장파 분열은 한국 장로교가 자신의 신학적 정체성을 놓고 벌인 최초의 공식적 대립이었습니다. 이는 교단 내에 오랫동안 잠재되어 있던 진보주의와 보수주의 신학 노선 간의 갈등이 '신학교 문제'를 계기로 폭발한 사건입니다. 이 분열을 통해 한국 장로교의 신학적 스펙트럼은 공식적으로 나뉘게 되었으며, 이는 교단 지형에 영구적인 변화를 가져온 역사적 분기점이었습니다.

분열의 배경 분석

1. 대립하는 두 신학교

  해방 이후 장로교 총회 산하에는 신학적으로 두 개의 다른 목소리를 내는 신학교가 공존했습니다. 하나는 김재준 목사가 주도하며 진보적·자유주의적 신학을 표방한 '조선신학교' 였고, 다른 하나는 보수 진영이 조선신학교를 견제하기 위해 1948년 서울에 새로 설립한 '장로회신학교' (교장 박형룡)였습니다.

 

  갈등은 1949년 제35차 총회에서 보수적 성향의 장로회신학교를 총회 직영으로 인준하면서 표면화되었습니다. 이로써 장로교 총회는 신학적 성격이 판이하게 다른 두 개의 신학교를 동시에 공인하는 모순적인 상황에 놓이게 되었습니다.

2. 신학교 통합 시도와 실패

  총회는 이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두 신학교의 통합을 추진했으나, 근본적인 신학 성향의 차이로 인해 이는 불가능했습니다. 결국 1951년 총회는 극약처방을 내렸습니다. 두 신학교의 직영 인준을 모두 취소하고, 피난지였던 대구에 교단이 직접 운영하는 새로운 '총회신학교' 를 개교하기로 결정한 것입니다.

갈등의 격화와 분열

1. 총회 결정에 대한 불복

  총회의 결정에 대해 두 신학교의 반응은 엇갈렸습니다. 박형룡 박사가 이끌던 장로회신학교 측은 총회 결정에 순응하여 폐교하고 새롭게 출범하는 총회신학교에 합류했습니다. 그러나 김재준 목사의 조선신학교(1951년 한국신학대학으로 개명) 측은 총회의 결정이 보수파에 편향되었다며 불복했습니다. 실제로 새로 개교한 총회신학교의 교수진이 박형룡을 중심으로 한 보수 인사들로 구성되면서 이러한 주장에 힘을 실어주었습니다.

2. 김재준 목사 제명

  총회의 결정에 불복한 한국신학대학 측에 대해 총회 다수파는 강경한 조치로 대응했습니다. 1953년 제39차 총회에서는 다음과 같은 엄격한 처벌을 결의했습니다.

  • 김재준 목사의 목사직 박탈
  • 한국신학대학 졸업생의 교역자 자격 불허
  • 김재준 목사의 신학을 옹호하거나 지지하는 자에 대한 처벌

  이는 사실상 김재준 목사와 그의 신학을 따르는 이들을 교단에서 축출하겠다는 선언과도 같았습니다.

분열의 결과와 특징 요약

1. 대한기독교장로회 창립

  총회의 강경한 조치에 반발한 김재준 측은 더 이상 총회에 남아있을 수 없다고 판단하고, 1953년 별도의 총회를 구성했습니다. 이듬해인 1954년, 이들은 '대한기독교장로회(기장)'를 창립하며 한국 장로교와의 분열을 공식화했습니다.

2. 교세와 지원 세력

  분열 당시 기장 측의 교세는 다음과 같았습니다.

  • 교회: 568개
  • 목사: 291명
  • 교인: 21,917명

  또한, 신학적으로 비교적 유연한 입장을 가졌던 캐나다 장로교회가 기존 총회에서 함께 나와 기장 측의 중요한 지원 세력이 되었습니다. 이 분열을 통해 한국 장로교는 보수주의 신학을 따르는 주류와 진보적 신학을 발전시키는 기장 측으로 명확히 나뉘게 되었습니다.

 

  보수 신앙과 진보 신학의 노선 갈등으로 두 교파가 분리된 이후, 남은 장로교 주류 세력은 안정을 찾는 듯 보였습니다. 하지만 그 내부에서는 또 다른 거대한 분열의 원인이 싹트고 있었습니다.

IV. 세 번째 분열: 통합(統合)과 합동(合同) 분열 (1959) - WCC 논쟁과 교권 다툼의 정점

  통합과 합동의 분열은 한국 장로교 역사상 최대 규모의 분열이자 가장 큰 상처를 남긴 사건이었습니다. 이 분열은 교회가 세계 교회와의 관계 설정이라는 외부적 도전과 내부의 부패 및 권력 투쟁이라는 문제를 동시에 마주했을 때 어떻게 붕괴될 수 있는지를 보여주는 비극적 사례입니다. 세계교회협의회(WCC) 가입이라는 신학적·국제적 쟁점, '3천만환 사건'과 같은 내부 추문과 교권 다툼, 그리고 지역 노회 문제 등이 복합적으로 얽혀 발생한 최악의 결과였습니다.

분열의 복합적 원인 분석

  이 거대한 분열은 다음 세 가지 핵심적인 원인이 상호작용하며 촉발되었습니다.

1) WCC 가입 문제: 세계 교회와의 관계 설정

  • 상반된 보고와 진영 대립: 갈등의 시작은 1954년 미국에서 열린 WCC 제2차 총회였습니다. 여기에 파견되었던 총회 대표단(김현정, 유호준 vs. 명신홍)은 귀국 후 완전히 상반된 보고를 내놓았습니다.
    • 옹호 입장 (에큐메니칼측): 김현정, 유호준 목사 등은 WCC 운동이 교회를 하나로 합치는 '합동(Union)'이 아니라, 단순히 협력하고 연대하는 '연합 운동(Unity)'일 뿐이므로 문제 될 것이 없다고 보고했습니다.
    • 반대 입장 (복음주의측): 명신홍 목사 등은 WCC가 정통 교리에서 이탈한 '종교 혼합주의' 이며, 공산주의를 용납하는 '용공주의' 성향을 띠고 있다며 가입을 강력히 반대했습니다.
  • 이념적 분열: 이 보고를 기점으로 교단 내부는 WCC 가입을 지지하는 '에큐메니칼측(Ecumenical)' 과 이를 반대하는 '복음주의측(Evangelical)' 으로 첨예하게 나뉘어 대립하기 시작했습니다.

2) 3천만환 사건: 교권 다툼의 도구

  • 사건의 전말: 당시 총회신학교는 서울 남산의 부지를 확보하기 위해 노력하고 있었습니다. 이때 로비스트를 자처한 박호근이라는 인물에게 부지 확보를 위한 활동비 명목으로 3천만환이라는 거액의 신학교 기금이 지급되었습니다. 그러나 이는 사기로 판명되었고, 돈은 회수 불가능하게 되었습니다.
  • 정치적 이용: 이 사건의 책임은 당시 신학교 교장이었던 박형룡 박사에게 집중되었습니다. 에큐메니칼 측은 이 사건을 보수주의 진영의 상징적 인물인 박형룡 박사를 공격하고 그의 퇴진을 압박하는 강력한 정치적 도구로 활용했습니다. 이로 인해 신학적 논쟁은 인신공격과 교권 다툼으로 변질되었습니다.

3) 경기노회 총대 문제: 분열의 도화선

  • 직접적 충돌의 빌미: 1959년 제44차 총회에서 분열의 직접적인 도화선이 된 것은 '경기노회 총대 문제' 였습니다. 황금천 목사의 총대 낙선 문제를 둘러싸고 경기노회 내부가 분열되면서, 두 개의 경기노회가 각각 총대를 파송하여 총회에 참석하는 사태가 벌어졌습니다. 이는 총회 현장에서 양측의 물리적 충돌을 유발하는 빌미를 제공했습니다.

분열의 결정적 순간

  1959년 대전에서 열린 제44차 총회는 결국 파국으로 치달았습니다. 경기노회 총대 자격 문제로 시작된 다툼은 걷잡을 수 없이 커졌고, 결국 총회는 두 개로 쪼개졌습니다.

  • 연동측 (통합): WCC 가입을 지지하는 에큐메니칼 측은 연동교회에서 별도로 총회를 속개했습니다. 이들이 훗날 예장통합 교단의 모체가 됩니다.
  • 승동측 (합동): WCC 가입을 반대하는 복음주의 측은 승동교회에서 총회를 이어갔습니다. 이들이 훗날 예장합동 교단의 뿌리가 됩니다.

  이로써 한국 장로교의 주류 세력은 돌이킬 수 없는 분열의 길로 들어서게 되었습니다.

 

  이처럼 한국 장로교는 1950년대라는 짧은 기간 동안 신앙의 순수성, 신학 노선, 그리고 세계 교회와의 관계라는 세 가지 중대한 도전에 직면하며 세 차례의 거대한 분열을 겪었습니다. 이는 오늘날 한국 장로교의 복잡한 교파 지형을 형성하는 결정적인 계기가 되었습니다.

V. 1950년대 장로교 분열의 역사적 의의와 유산

  1950년대 한국 장로교가 겪은 세 차례의 대분열은 각기 다른 원인에서 출발했지만, 공통적으로 신학과 신앙, 그리고 교권이라는 세 가지 요소가 복잡하게 얽혀 발생한 비극이었습니다. 본 보고서에서 분석한 각 분열의 핵심 원인을 종합하면 다음과 같습니다.

  • 고려파 분열 (1951): 일제강점기 신사참배 문제 청산을 둘러싼 갈등으로, '신앙의 순결성' 회복을 최우선 가치로 내세운 출옥성도 그룹과 기존 교권 세력의 충돌이었습니다.
  • 기장파 분열 (1953): '신학 노선의 차이' 가 근본 원인이었습니다. 성서 해석과 신학 방법론을 둘러싼 보수주의와 진보주의 간의 이념적 대립이 결국 교단 분리로 이어졌습니다.
  • 통합/합동 분열 (1959): '세계교회와의 관계 설정(WCC)' 이라는 외부적 요인과 '내부 교권 갈등' 이라는 내부적 요인이 복합적으로 작용했습니다. 신학적 쟁점이 교권 다툼의 도구로 변질되면서 최악의 분열을 낳았습니다.

  1950년대의 대분열은 오늘날 한국 장로교가 수백 개의 교단으로 나뉘는 결과를 초래한 결정적인 역사적 분기점이었습니다. 이 시기에 형성된 신학적·정치적 대립 구도는 이후에도 계속해서 분열의 원인이 되었고, 한국 교회 전체의 연합과 일치를 가로막는 깊은 상처로 남았습니다.

 

  이 분열의 역사는 한국 장로교회 안에 하나의 반복적인 패턴이 존재함을 보여줍니다. 즉, 신학적·교리적 논쟁은 교권과 지역적 이해관계와 분리될 수 없으며, 종종 제도적 권력과 영향력을 둘러싼 갈등의 대리전(proxy war)이 되어왔습니다. 1950년대에 확립된 이러한 역사적 선례는 현대 한국 교회의 분열된 지형을 지속적으로 정의하고 있으며, 이는 교회의 일치와 연합을 위한 논의가 단순히 신학적 차이를 해소하는 것을 넘어 교회 정치의 근본적인 구조와 권력 문제를 함께 다루어야 함을 시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