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교회사

3.1 운동 이후, 한국 기독교는 어떤 길을 걸었나: 주요 신학 흐름 탐구

제이람 2025. 11. 4. 15:53

희망과 좌절의 교차로에 선 한국 기독교

  3.1 운동은 한국 사회와 기독교에 거대한 족적을 남겼습니다. 하지만 거국적인 만세 운동의 결과는 즉각적인 독립이 아닌 수많은 희생으로 귀결되었고, 이는 민족 전체에 깊은 실망감과 좌절감을 안겨주었습니다. '독립은 불가능한 것인가?'라는 무거운 질문 앞에서, 한국 기독교는 신앙의 본질적인 두 갈래 길을 마주하게 됩니다. 이 고통스러운 현실을 초월하여 하늘의 소망을 붙들 것인가, 아니면 무너진 현실 속으로 더 깊이 들어가 민족을 변혁하는 사명을 감당할 것인가.

 

  이러한 시대적 고민 속에서 한국 기독교는 크게 두 가지 흐름으로 나아갔습니다. 하나는 암울한 현실 너머 초자연적인 하나님의 역사를 갈망한 '초월적 신비주의'였고, 다른 하나는 무너진 땅 위에 민족의 역량을 세우고자 한 '현실적 계몽주의'였습니다. 이 글은 3.1 운동 이후 한국 기독교가 걸어간 이 두 갈래의 길과, 새롭게 마주해야 했던 외부의 사상적 도전들을 심도 있게 탐구하고자 합니다.

1. 초월적 신비주의: 고난의 현실 너머, 하늘의 소망을 붙들다

  3.1 운동의 실패는 많은 이들에게 "이 땅에는 더 이상 소망이 없다"는 절망감을 심어주었습니다. 이러한 시대적 배경 속에서 기독교인들은 인간의 계획이 아닌 초자연적인 하나님의 역사와 내세에 대한 소망을 더욱 강하게 붙들기 시작했습니다. 이것이 바로 '초월적 신비주의' 운동의 시작이었습니다.

1.1. 길선주 목사의 '말세학' 사경회: 한반도에 임할 지상낙원

  민족대표 33인 중 한 명이었던 길선주 목사는 2년간의 옥고를 치르며 요한계시록을 깊이 묵상했습니다. 그 횟수에 대해서는 700독에서 1만 독까지 기록의 편차가 있지만, 그가 말씀을 거의 암송할 경지에 이르렀음은 분명합니다. 이 깊은 묵상을 통해 그는 '말세학(末世學)'이라는 독특한 종말론을 정립했고, 이를 바탕으로 말씀을 깊이 연구하는 '사경회'를 전국적으로 이끌었습니다.

 

  그의 종말론이 가진 가장 독특한 특징은 이 세상이 단순히 불타 없어지는 것이 아니라는 점입니다. 그는 비관적인 현실 앞에서 "한반도 삼천리반도 금수강산"은 하나님께서 보존하시고 회복시켜주실 '지상낙원'이 될 것이라는 희망의 메시지를 전파했습니다. 이는 일제 치하에서 고통받던 민족에게 이 땅이 결코 사라지지 않을 영원한 삶의 터전이라는 소망을 심어주었습니다.

1.2. 김익두 목사의 이적 집회: 기적을 통한 위로와 영적 각성

  황해도의 유명한 깡패였던 김익두 목사의 삶은 그 자체로 하나의 기적이었습니다. 시장 상인들의 돈을 빼앗아 '김래라(김씨, 내놔라)'는 별명으로 악명이 높았던 그는, 어느 날 한 여성 선교사를 만납니다. "나더러 양귀신을 믿으라고"라며 전도지를 코를 풀어 던져버리는 모욕을 주었지만, "청년, 전도지로 코를 풀면 코가 썩어요"라고 담담히 응수하는 선교사의 모습에 깊은 인상을 받습니다. '저 개화된 여인이 무엇 때문에 나 같은 사람에게 이런 수모를 당할까?'라는 의문은 그를 교회로 이끌었습니다.

 

  그의 철저한 성격은 신앙에서도 드러나, 세례를 받기 전 신약성경을 100번이나 읽는 열정을 보였습니다. 이후 신유(神癒)의 은사를 받은 그의 사역은 '이적 기사 집회'로 대표됩니다. 특히 경북 현풍교회 집회에서 사고로 아래턱이 빠진 채 살아가던 박수진이라는 여인을 치유한 사건은 그의 명성을 전국에 알렸습니다. 3.1 운동 이후 희망을 잃은 민중에게 병 고침과 같은 초자연적 성령의 역사는 삶의 용기를 주는 하나님의 위로였고, 그는 '시대의 메신저' 역할을 감당했습니다.

 

  그러나 그의 이적은 단순한 기복 신앙이 아니었습니다. 병이 나은 기생 출신 여인이 다시 옛 직업으로 돌아가자 병이 재발했다는 일화는, "아무리 치유를 받아도 그리스도인답게 살지 않으면 그 역사가 지속되지 않는다"는 교훈을 남기며 삶의 근본적인 변화를 촉구했습니다.

 

  그의 말년은 한국 현대사의 비극을 고스란히 보여줍니다. 해방 후 북한에서 공산 정권이 세운 어용 단체 '조선기독교연맹'의 초대 회장으로 마지못해 추대되었으나, 6.25 전쟁 중 후퇴하던 인민군에게 새벽 기도를 마치고 나오다 총에 맞아 순교했습니다. 공산당에 의해 이용당하다 결국 그들의 손에 죽임을 당한 그의 삶은 깊은 비극적 아이러니를 남깁니다.

1.3. 이용도 목사의 신비주의: '예수에게 미치다'

  어려서부터 병을 달고 살았던 이용도 목사는 3.1 운동에 참여해 옥고를 치른 후 신학을 공부했습니다. 그의 집회는 '눈물의 집회'로 유명했는데, 자신의 고통스러운 삶을 통해 체득한 그리스도의 사랑을 절절히 토해낼 때 회중은 함께 눈물의 홍수를 이루었습니다.

 

  그의 신비주의는 '그리스도와의 완전한 합일(合一)'을 추구하는 신앙으로 요약됩니다. "예수에게 미쳐야겠나이다"라는 그의 고백은, 자신의 인격이 그리스도의 인격으로 완전히 변화되는 영적 체험에 대한 갈망이었습니다.

 

  하지만 그의 신비주의는 직접 계시를 주장하며 논란이 된 '유명화'라는 여성과의 관계로 인해 문제에 휩싸였습니다. 그가 유명화 앞에서 "주여"라고 부르며 엎드렸다는 사건이 빌미가 되어, 그는 결국 장로교와 감리교 양측에서 이단으로 정죄받고 공식적인 사역의 길이 막혔습니다. 비극은 여기서 그치지 않았습니다. 한 집회에 초청받아 갔다가 이단이라는 이유로 일부 신도들에게 집단 구타를 당했고, 이 충격으로 지병이었던 폐병이 악화되어 1933년, 33세의 젊은 나이로 세상을 떠났습니다.

 

  이처럼 길선주, 김익두, 이용도 목사는 각각 말씀 해석(말세학), 이적(신유), 신비 체험(합일)이라는 다른 방식을 통해 하늘의 소망을 전했습니다. 이들이 암울한 현실 너머의 하나님을 바라볼 때, 또 다른 기독교인들은 자신들이 발 딛고 선 이 땅, 즉 피폐해진 농촌과 타락한 도시의 현실이야말로 자신들의 사명지라고 믿었습니다.

2. 현실적 계몽주의: 무너진 땅 위에 민족의 역량을 세우다

  "그래도 이 현실 세계에서 기독교인들이 민족을 깨우고 역량을 키우는 사명을 감당해야 한다." 이러한 문제의식에서 현실적 계몽주의 운동이 시작되었습니다. 특히 이 운동은 청년들을 타락시켜 민족정신을 말살하려던 일제의 문화 정책(술, 담배, 아편, 공창 권장)에 대한 기독교의 적극적인 저항이었습니다.

2.1. 주요 사회 개혁 운동

  기독교는 생활 전반의 개혁을 통해 민족의 자강(自强)을 꾀했습니다.

  • 금주·절제 운동: 세계기독교 여자 절제회의 영향으로 시작된 이 운동은 단순한 절제를 넘어섰습니다. 당시 술과 담배는 총독부가 직접 관리하는 '전매품'이었기에, 찬송가에 실린 '금주가(禁酒歌)'를 부르며 금주를 외치는 것은 일제의 경제권에 저항하는 '민족 저항 운동'의 성격을 띠었습니다.
  • 농촌 운동: 당시 인구의 80%를 차지했던 농촌은 일제의 경제적 침탈로 피폐해졌습니다. YMCA와 같은 기독교 기관들은 농촌을 살리기 위해 문맹 퇴치, 농사 기술 개량, 협동 정신 함양을 목표로 농촌 계몽 운동을 활발히 전개했습니다.
  • 기타 운동: 이 외에도 물자 절약을 위한 '색옷 입기 운동'(전통적인 흰옷은 쉽게 더러워져 낭비가 심하다는 이유)과 사회 윤리 회복을 위한 '공창 폐지 운동' 등을 통해 기독교는 사회 전반의 개혁에 앞장섰습니다.

  이처럼 기독교가 사회 개혁을 통해 민족의 역량을 키우는 동안, 전혀 다른 이념이 민족 해방의 새로운 대안으로 떠오르며 기독교와 피할 수 없는 충돌을 예고하고 있었습니다.

3. 새로운 도전: 사회주의 사상과 무교회주의의 등장

  이 시기 한국 기독교는 내부 개혁뿐 아니라, 외부에서 밀려온 새로운 사상적 도전에 직면해야 했습니다.

3.1. 사회주의의 유입과 기독교와의 갈등

  1917년 러시아 볼셰비키 혁명의 성공은 '프롤레타리아(무산계급) 혁명' 사상을 전 세계로 확산시켰습니다. '억압받는 계급의 해방'이라는 논리는 '피억압 민족의 해방'이라는 독립운동의 논리와 결합하며 당시 지식인들에게 큰 영향을 주었습니다.

 

  그러나 사회주의는 기독교와 근본적으로 충돌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사회주의의 '무신론적 유물사관'은 영혼이나 천국 같은 정신세계를 부정하고, 종교를 민중을 마비시키는 '아편'으로 간주했기 때문입니다. 이로 인해 사회주의 세력이 강했던 간도와 만주 지역에서는 기독교인들을 '일제의 밀정'으로 몰아 잔인하게 살해하는 사건들이 발생했습니다. 특히 김영진 목사와 김영국 장로 형제는 공산주의자들에게 가죽이 벗겨져 죽임당하는 만행을 겪으며 끔찍한 순교를 당했습니다.

3.2. 김교신의 무교회주의: 조선적인 기독교를 향한 모색

  무교회주의는 기존 교회의 교리와 예식, 교단주의를 비판하고 오직 성서 연구에 집중하며 민족적 사명을 추구한 자생적 기독교 흐름입니다.

   

  다만 '무교회(無敎會)'라는 명칭은 교인들의 공동체인 '에클레시아' 자체를 부정한 것이 아니라, 인간이 만든 교단이나 교파의 권위를 거부했다는 의미에서 '무교단주의' 혹은 '무교파주의'로 이해하는 것이 더 정확합니다.

 

  핵심 인물인 김교신은 잡지 '성서조선'을 창간하며 "새로운 조선을 성서 위에 세우자"고 주장했습니다. 그는 서구 선교사 중심의 기독교에서 벗어나 우리 민족의 정신이 담긴 '조선적인 기독교'를 만들고자 했습니다. 그의 민족정신은 '조와(弔蛙, 개구리의 죽음을 애도함)'라는 권두언에서 상징적으로 드러납니다.

 

  "지난겨울의 비상한 혹한에... 동사한 개구리 시체를 모아 매장하여 주고 보니, 담저(潭底)에 아직 두어 마리 기어다닌다. 아, 전멸은 면했나 보다!"

 

  그는 '혹한 속에서도 살아남은 몇 마리의 개구리'를 통해, 일제의 혹독한 탄압 속에서도 결코 꺼지지 않는 민족의 생명력을 표현했습니다. 이 글로 인해 그는 결국 옥고를 치렀고 '성서조선'은 폐간되었습니다.

 

  외부의 이념적 도전과 내부의 자생적 개혁 운동 속에서, 기독교 내부에서는 서구에서 들어온 새로운 신학을 둘러싼 또 다른 격렬한 논쟁이 벌어지기 시작했습니다.

4. 신학적 격동기: 자유주의 신학과 보수 신학의 대립

  일본과 미국 유학생들을 통해 성경을 합리적이고 비평적으로 해석하려는 '신신학(자유주의 신학)'이 국내에 소개되면서, 성경의 권위와 초자연적 역사를 문자 그대로 믿는 전통적인 보수 신학과 정면으로 충돌했습니다.

4.1. 논쟁의 서막: 적극신앙단과 장로교의 논쟁들

  • 적극신앙단 운동: 1932년 YMCA 총무 신흥우를 중심으로 조직된 이 운동은 당시 한국 교회의 기득권을 향해 세 가지 구호를 외쳤습니다.
    • '반서북(反西北)': 교권을 장악한 서북(평안도, 황해도) 지역 출신에 대한 반대
    • '반선교사(反宣敎師)': 선교사 중심의 교회 운영에 대한 반대
    • '반보수(反保守)': 전통적 보수 신학에 대한 반대 이 운동은 한국 교회의 지역주의, 선교사 의존, 신학적 경직성에 대한 최초의 조직적 문제 제기라는 의의를 가집니다.
  • 장로교 내 신학 논쟁:
    1. 창세기 저작권 및 여성 안수 문제: 김영주 목사가 '모세의 창세기 저작'을 부인하고, 김춘배 목사가 '여자는 교회에서 잠잠하라'는 성경 구절의 시대적 한계를 지적하는 등 자유주의적 해석이 등장했으나, 총회는 이를 신조 위반으로 규정하며 강경하게 대처했습니다.
    2. 아빙돈 단권 주석 사건: 감리교가 주도하여 번역한 진보적 성향의 '아빙돈 주석'에 여러 장로교 목사들이 번역자로 참여한 사실이 큰 논란이 되었습니다. 결국 관련자들이 총회에 사과하면서 사건이 일단락되었습니다.

4.2. 두 거인의 대립: 박형룡 vs. 김재준

  이러한 신학적 대립은 '한국 보수 신학의 아버지' 박형룡과 '한국 자유주의 신학의 아버지' 김재준이라는 두 거두의 논쟁에서 절정을 이루었습니다. 두 사람의 호(號)는 그들의 신학적 지향점을 상징적으로 보여줍니다.

구분 죽산 박형룡 (보수 신학의 아버지) 장공 김재준 (자유주의 신학의 아버지)
핵심 사상 프린스턴 신학교의 그레샴 메이첸에게 영향을 받아, 기독교의 초자연적 역사와 성경의 권위를 절대적으로 수호해야 한다고 주장했습니다. 성경을 하나님의 말씀으로 인정하지만, 문자 하나하나가 영감되었다는 '축자영감설'을 거부했습니다. 시대적 상황에 맞는 합리적 해석을 강조했습니다.
대표 저작/주장 한국인 최초의 조직신학 저서인 '기독교 근대신학 난제 선평'을 저술하여 자유주의 신학을 비판했습니다. '이사야의 임마누엘 예언 연구' 논문 등에서 히브리어 '알마(almah)'를 '처녀'가 아닌 '젊은 여자'로 해석할 수 있다고 주장하며 축자영감설을 비판했습니다.
호(號)의 의미 죽산(竹山): 대나무처럼 굳고 올바른 신학적 절개를 상징합니다. 장공(長空): 교리에 얽매이지 않고 드넓은 하늘처럼 자유로운 사유를 추구함을 상징합니다.

분열과 성숙의 시대를 넘어

  3.1 운동 이후 한국 기독교는 실로 격동의 시기를 보냈습니다. 현실을 초월하려는 신비주의, 현실을 개혁하려는 계몽주의로 나아갔고, 외부에서는 사회주의의 거센 도전에 직면했으며, 내부에서는 무교회주의라는 새로운 흐름과 보수-자유주의 신학 논쟁이라는 치열한 지적 씨름을 겪어야 했습니다.

 

  이 시기는 단순히 혼란과 갈등의 시대만은 아니었습니다. 외부의 도전에 맞서고 내부의 정체성을 고민하는 이 치열한 과정을 통해, 한국 기독교는 비로소 서구 선교에 의존하던 단계를 넘어 스스로의 신학과 사회적 역할을 모색하는 중요한 성숙의 과정을 거치게 되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