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교회사

3.1운동 이후 한국 기독교의 다원화와 갈등: 주요 사상적 흐름 분석 보고서

제이람 2025. 11. 4. 15:48

I. 서론 (Introduction)

  3.1운동은 한국 근현대사, 특히 기독교 역사에서 중대한 분수령으로 자리한다. 거족적 독립 의지의 표출이었음에도 불구하고 가시적 성과를 달성하지 못했다는 인식은 민족 전체에 깊은 실망감과 무력감을 안겨주었다. 이러한 역사적 좌절 속에서 한국 기독교 공동체는 단일한 방향성을 상실하고, 시대적 과제와 신앙의 본질에 대한 각기 다른 해답을 모색하며 여러 갈래의 뚜렷한 사상적 흐름으로 분화하기 시작했다.

 

  본 보고서는 3.1운동 이후 한국 기독교 내부에서 형성된 주요 흐름과 그 상호작용을 심층적으로 분석하는 것을 목표로 한다. 구체적으로, 암울한 현실을 초월하고자 했던 초월적 신비주의 운동, 민족의 역량 강화를 통해 사회를 개혁하려 한 현실적 계몽주의 운동, 외부로부터 유입되어 기독교에 새로운 도전이 된 사회주의와 무교회주의, 그리고 교회 내부의 정체성을 둘러싸고 격화된 보수주의와 자유주의의 신학적 갈등이라는 네 가지 핵심 흐름을 체계적으로 조명하고자 한다.

 

  이를 통해 본 보고서는 3.1운동 이후 한국 기독교가 어떻게 다원화되었으며, 어떠한 내적·외적 갈등을 겪으며 현대 한국 교회의 복합적인 정체성을 형성하게 되었는지 그 역사적 연원을 추적할 것이다.

II. 초월적 신비주의 운동: 현실을 넘어선 영적 대안의 모색

  3.1운동의 실패와 더욱 가혹해진 일제의 식민 통치는 수많은 민중에게 현실 세계에 대한 깊은 절망감을 안겨주었다. 이러한 상황에서 일부 기독교 지도자들은 지상의 소망을 넘어선 영적 대안을 제시하기 시작했다. 초월적 신비주의 운동은 이 땅의 고통을 신앙의 힘으로 극복하고, 내세와 영적 체험에서 희망을 찾으려는 신앙적 몸부림이자 시대적 요청에 대한 응답이었다.

1. 길선주: '말세학'을 통한 민족적 종말론

  민족대표 33인 중 한 사람이었던 길선주 목사는 3.1운동으로 2년간 옥고를 치렀다. 그는 옥중에서 요한계시록을 수백 번 이상 읽으며 깊이 연구했고, 이를 바탕으로 독자적인 '말세학'을 정립했다. 그의 종말론은 당시 서구 선교사들이 전파하던, 세상이 완전히 불타 없어지는 종말론과는 다른 독특한 특징을 가졌다. 그는 한반도에 지상 낙원이 성취될 것이라는 믿음을 설파했다. 길선주는 그의 저서에서 "예수 밟으시던 지구는 새 땅이 되어 영원히 있을 것이오. 에덴의 위치이던 지구는 소각될 것이 아니라… 이 지구는 무궁안식 세계가 될 것이다"라고 주장하며, 일제 치하에서 고통받는 민족에게 이 땅이 결코 버려지지 않고 회복될 것이라는 구체적이고 민족적인 희망을 심어주었다. 출옥 후 그는 '말세학 사경회'를 주도하며 전국을 순회했지만, 사회주의 사상에 영향을 받은 일부 청년들의 배척과 폭행으로 인해 오랫동안 시무하던 평양 장재원교회를 사임해야 하는 아픔을 겪기도 했다.

2. 김익두: 이적과 치유를 통한 민중의 위로

  상인에서 시장 상인들을 위협하던 악명 높은 깡패로 전락했던 김익두는 한 여성 선교사의 전도를 받고 극적으로 회심한 인물이다. 신앙을 갖게 된 후 신구약 성경을 수백 번 읽고 기도를 쉬지 않는 등 철저한 신앙인으로 변모한 그는, 특히 신유의 은사를 받아 전국을 돌며 '이적집회'를 열었다. 경북 현풍교회 집회에서 아래턱이 빠져 거동이 불편했던 박수진이라는 여성을 치유한 사건은 그의 이적 사역을 널리 알리는 계기가 되었다. 그의 집회를 통해 수많은 중풍병자, 앉은뱅이, 벙어리가 치유받는 기적이 일어났고, 이러한 초자연적 현상은 희망을 잃고 질병과 가난에 시달리던 민중에게 실질적인 위로와 영적 생명력을 불어넣었다. 하지만 그의 사역은 기독교 내부의 비판과 "기독교 신앙을 미신적으로 만든다"고 공격한 사회주의자들의 거센 반대에 부딪히기도 했다. 그는 말년에 신사참배를 거부하다 모진 고문을 당하면서도 "주여 고통때문에 실언할까 두렵사오니 종의 입술을 지켜주옵소서"라고 기도하며 신앙을 지켰다. 해방 후 북한에서 '조선기독교 연맹'의 초대 회장으로 추대되었으나, 6.25 전쟁 중 후퇴하던 인민군에 의해 살해당하는 비극적인 최후를 맞았다.

3. 이용도: 그리스도와의 합일을 추구한 신비주의

  이용도는 3.1운동에 가담하여 2년간 옥살이를 했으며, 본래 허약했던 몸이 폐병 3기에 이를 정도로 악화되었다. 요양 중 참여한 부흥회에서 깊은 영적 체험을 한 그는 "예수에게 미쳐야하겠나이다"라고 고백하며 그리스도와의 완전한 영적 합일을 추구하는 신비주의 신앙에 깊이 빠져들었다. 그의 눈물과 간증이 담긴 집회는 많은 이들에게 큰 감동을 주었으나, 그의 신비주의는 점차 기성 교단과 갈등을 빚었다. 특히 직접 계시를 주장하며 '신 들렸다'고 알려진 유명화라는 여성에게 "주여"라고 부르며 무릎 꿇은 사건은 그가 이단으로 정죄받는 결정적인 계기가 되었다. 결국 그는 장로교와 감리교 양 교단에서 이단으로 규정되고 모든 공식적인 사역의 문이 닫혔으며, 1933년 33세의 젊은 나이로 세상을 떠났다.

 

  이처럼 길선주, 김익두, 이용도로 대표되는 신비주의 운동은 동일한 민족적 절망에 대한 각기 다른 영적 처방이었다고 분석할 수 있다. 길선주의 종말론이 민족 공동체의 미래에 대한 거시적 희망을 제시했다면, 김익두의 치유 사역은 고통받는 개인에게 즉각적이고 가시적인 구원을 제공했다. 그리고 이용도의 신비주의는 극심한 현실로부터의 내면적 도피와 그리스도와의 개인적 합일을 통한 영적 위안을 추구했다. 이 세 흐름은 암울한 현실 속 민중에게 초월적인 위로를 제공함과 동시에, 기성 교단과의 신학적 마찰을 일으키며 한국 기독교 내부에 새로운 긴장을 만들어냈다.

III. 현실적 계몽주의 운동: 민족 역량 강화를 통한 사회 개혁

  초월적 신비주의가 내면의 영성에 집중했다면, 현실적 계몽주의는 사회를 개혁하고 민족의 역량을 강화하는 것을 신앙인의 사명으로 여겼다. 이 운동은 일제가 소위 '문화 정치'를 표방하며 술, 담배, 아편, 공창 등을 조장하여 한국 민족을 정신적으로 타락시키려 한 민족 말살 정책에 대한 기독교의 직접적인 전략적 반작용으로 이해해야 한다.

  1. 절제 운동 (Temperance Movement): 1923년 세계기독교 여자 절제회 인사의 방한을 계기로 시작된 이 운동은 기독교 여성들을 중심으로 전국적으로 확산되었다. 특히 금주 운동에 역점을 두었는데, 이는 단순히 개인의 도덕성 함양을 넘어 일제의 경제적 수탈에 저항하는 의미를 담고 있었다. 당시 주류 판매는 총독부의 주요 수입원이었기 때문이다. 이러한 저항 정신은 신정찬송가에 수록된 "금주가"의 가사에 잘 나타나 있다.
  2. 이 찬송은 단순한 권면을 넘어, 술값을 모아 학교를 세우고 민족의 미래를 준비하자는 구체적인 대안을 제시하며 민족 저항 운동의 노래로 불렸다.
  3. 사회 정화와 실용주의 운동 (Social Purity and Practicality Movements): 기독교계는 민족의 도덕적 정화와 실용적 역량 강화를 목표로 다양한 사회 운동을 전개했다. 일제가 공인한 성매매 제도인 '공창'을 폐지하기 위해 교회가 위원회를 조직하고 사회적 여론을 환기하는 등 적극적인 활동을 펼쳐 사회의 도덕성을 지키고자 했다. 이와 더불어, 백의민족의 전통을 존중하면서도 쉽게 더러워져 물자와 시간이 낭비되는 흰옷 대신 색깔 있는 옷을 입어 물자를 절약하자는 실용적인 '색옷입기운동'도 전개되었다.
  4. 농촌 운동 (Rural Movement): 당시 인구의 80%가 농민이었던 현실에서 농촌 계몽은 시대의 가장 중요한 과제였다. YMCA와 같은 기독교 기관들은 농촌으로 들어가 문맹퇴치, 농사개량, 협동정신 함양을 3대 목표로 삼고 농촌 운동을 주도했다. 선교사 러츠(Lutz)는 윤작제와 같은 선진 농사 기술을 보급하고, 숭실전문학교에 농과를 신설하여 농민 지도자를 양성했다. 하지만 이 운동 역시 일제의 탄압을 피하지 못했으며, 1938년 '농우회 사건'으로 관련 지도자들이 대거 체포되면서 크게 위축되었다.

  이러한 계몽주의 운동은 기독교가 민족의 현실 문제에 깊이 관여하며 사회적 책임을 다하려 했던 노력의 산물이었다. 그러나 이러한 내부적 개혁 노력은 외부로부터 유입된 강력한 외래 사상들과의 경쟁 및 충돌이라는 새로운 국면을 맞이하게 된다.

IV. 외래 사상의 도전: 사회주의와 무교회주의의 등장

  3.1운동 이후의 혼란기는 외래 사상이 한국 사회에 강력한 영향력을 미치기 시작한 시기이기도 했다. 특히 유물론적 세계관에 기반한 사회주의와 제도 교회를 비판하는 무교회주의는 전통적인 기독교 신앙에 큰 도전이 되었다.

1. 사회주의와 공산주의의 위협

  1917년 러시아 볼셰비키 혁명 이후 유입된 사회주의 사상은 제국주의에 맞서 피지배 민족의 해방을 추구한다는 점에서 일부 독립운동가들에게 큰 매력으로 다가왔다. 마르크스주의의 '프롤레타리아' 계급 투쟁 개념이 한국의 상황에 그대로 적용되어, 식민지 조선은 '프롤레타리아 민족'으로, 제국주의 일본은 '부르주아 국가'로 인식되었기 때문이다. 이 논리는 민족 해방 투쟁에 강력한 이론적 기반을 제공했다. 하지만 유물론적 세계관과 무신론을 근간으로 하는 사회주의는 기독교 신앙과 근본적으로 양립할 수 없었다.

 

  이러한 이념적 대립은 만주와 간도 등지에서 활동하던 공산주의자들의 기독교 박해라는 참혹한 현실로 이어졌다.

  • 1925년 중국 길림성에서는 공산주의자들이 침례교 선교사 윤학영을 포함한 4명을 '일제의 밀정'이라는 누명을 씌워 살해했다.
  • 1932년 간도에서는 김영진 목사와 그의 동생 김영국 장로에게 "기독교를 따를 것인가, 공산주의를 따를 것인가" 선택하라고 강요한 뒤, 신앙을 고백하자 산 채로 가죽을 벗겨 죽이는 만행을 저질렀다.

2. 무교회주의 운동

  일본 유학 중 우치무라 간조(内村鑑三)를 만나 깊은 감명을 받은 김교신은 '조선적인 기독교' 설립을 목표로 무교회주의 운동을 이끌었다. 그는 1927년 동지들과 함께 잡지 성서조선을 창간하며 다음과 같은 창간사를 남겼다.

 

  "조선에 성서를 주어 그 골근을 세우며 그 혈액을 만들고자 하였고… 새로운 조선을 성서 위에 세우자."

 

  무교회주의 운동의 특징은 다음과 같이 요약할 수 있다.

  1. 기성 교회의 권위 부정: 교단, 교리, 성례와 같은 제도화된 교회의 모든 형식을 부정하고, 오직 성서 연구에만 집중하는 신앙 공동체를 추구했다.
  2. 민족적 사명 강조: 신앙을 민족적 사명과 결부시켜, 서구 선교사들의 영향력에서 벗어난 조선인만의 기독교를 세우고자 했다. 이러한 흐름은 점차 '반선교사 운동'으로 발전하기도 했다.

  성서조선은 1942년 3월, 권두언으로 실린 "조와(弔蛙, 개구리의 죽음을 애도함)"라는 글이 문제가 되어 폐간되었다. 이 글은 혹독한 겨울에 얼어 죽은 개구리들 사이에서도 살아남은 몇 마리를 보며 "전멸은 면했나 보다!"라고 쓴 것으로, 일제의 탄압 속에서도 결코 멸망하지 않을 민족의 생명력을 암시했다. 이 사건으로 김교신을 비롯한 주요 인물들이 투옥되었고, 무교회주의 운동은 큰 타격을 입었다.

 

  이처럼 외부에서 유입된 새로운 사상들은 한국 기독교에 심각한 박해를 가하는 한편, 기독교의 본질과 형태에 대한 근본적인 질문을 던지며 내부의 신학적 논쟁을 더욱 심화시키는 계기가 되었다.

V. 신학적 갈등의 심화: 보수주의와 자유주의의 대립

  1930년대에 이르러 서구에서 유학하고 돌아온 신학자들을 통해 '신신학(新神學)'이라 불리던 자유주의 신학이 본격적으로 소개되면서, 한국 장로교회는 극심한 신학적 갈등에 휩싸였다. 이는 기존의 보수적 정통 신앙과 새로운 신학 사상 간의 정면충돌이었다.

1. 초기 신학 갈등의 양상

  • 적극신앙단 운동: 1932년 YMCA 총무 신흥우를 중심으로 조직된 이 운동은 "반서북, 반선교사, 반보수"라는 세 가지 구호를 내걸었다. 이는 당시 한국 교회의 주도권을 장악하고 있던 평안도·황해도 중심의 서북 지역 세력과 선교사들의 기득권, 그리고 보수 신학에 대한 정면 도전이었다.
  • 장로교 내 초기 신학 논쟁: 신신학의 영향으로 장로교 내부에서는 여러 논쟁이 발생했다. 김영주 목사는 모세의 창세기 저작권을 부인했고, 김춘배 목사는 "여자는 교회에서 잠잠하라"는 성경 구절이 당시의 문화적 산물이라고 주장하며 여성의 교권을 옹호했다. 또한, 감리교가 선교 50주년을 기념해 출간한 진보적 성향의 아빙돈 단권 주석 번역에 일부 장로교 목사들이 참여한 사실이 알려지면서 큰 파문이 일기도 했다.

2. 박형룡과 김재준의 대립

  현대 한국 장로교를 가르는 거대한 신학적 균열은 '한국 보수신학의 아버지' 박형룡과 '한국 자유주의 신학의 아버지' 김재준이라는 두 거목의 대립으로 인격화되었다. 이들의 신학적 세계관은 그들의 호(號)에 상징적으로 드러난다. 박형룡의 호인 죽산(竹山)은 대나무처럼 굳건하고 변치 않는 신학적 입장을, 김재준의 호인 장공(長空)은 제약 없이 넓게 펼쳐진 하늘처럼 자유로운 신학적 탐구를 상징했다.

 

  이러한 사상적 대립은 현실적인 갈등으로 이어졌다. 김재준은 미국 유학 중 보수적인 웨스트민스터 신학교에서 보다 진보적인 웨스턴 신학교로 옮겼는데, 이를 인지하고 있던 박형룡은 김재준의 신학적 노선에 의문을 제기하며 그가 평양신학교 교수로 임용되는 것을 막았다. 이는 개인적 차원을 넘어, 한국 교회의 신학적 방향성을 둘러싼 제도적 권력 투쟁의 서막을 알리는 사건이었다. 두 인물의 신학적 입장은 다음과 같이 명확히 구분된다.

항목 (Category) 죽산 박형룡 (Juksan Park Hyung-ryong) 장공 김재준 (Jang-gong Kim Jae-jun)
대표 호칭 (Title) "한국 보수신학의 아버지" "한국 자유주의 신학의 아버지"
주요 유학 배경 (Education) 미국 프린스턴 신학교, 그레샴 메이첸에게 사사 (Studied under Gresham Machen) 일본 청산학원, 미국 웨스턴 신학교
성경관 (View of Scripture) 성경의 축자영감설과 무오성 고수 (Upheld verbal plenary inspiration and inerrancy of Scripture) 성경의 축자영감설 거부, 성경을 시대적 산물로 해석
주요 저작/주장 (Key Work/Argument) "기독교 근대신학 난제 선평" (한국 최초의 조직신학 저서) "이사야의 임마누엘 예언 연구" (성경의 축자영감설 비판)

 

  이 두 인물을 중심으로 한 신학 논쟁은 단순한 학문적 논쟁을 넘어 한국 장로교 분열의 씨앗이 되었으며, 이는 오늘날까지 이어지는 한국 기독교의 신학적 다양성과 갈등의 뿌리가 되었다.

VI. 결론 (Conclusion)

  3.1운동 이후의 시기는 한국 기독교가 하나의 단일한 정체성을 넘어 다원적인 형태로 분화되는 결정적인 시기였다. 민족적 실패라는 거대한 역사적 충격 속에서 한국 교회는 현실을 초월하려는 신비주의적 흐름과 현실을 개혁하려는 사회 운동적 흐름으로 나아갔다. 동시에 사회주의와 무교회주의라는 외래 사상의 도전은 기독교의 사회적 역할과 정체성에 대한 근본적인 질문을 던졌다.

 

  이 시기에 형성된 긴장과 흐름들—초월적 신앙과 사회 참여 사이의 갈등, 토착적 신앙 운동과 기성 교회의 권위 다툼, 그리고 무엇보다 성경과 신학을 둘러싼 보수와 진보의 첨예한 대립—은 현대 한국 기독교의 유전자를 깊이 각인시켰다. 이 시대의 흐름들은 단순히 지나간 과거가 아니라, 오늘날 한국 교회의 역동성, 분열, 그리고 사회적 영향력의 근원을 이해하는 핵심적인 열쇠이다.

 

  결론적으로, 3.1운동 이후의 격동기는 한국 기독교에 시련과 갈등의 시간이었지만, 동시에 스스로의 신앙을 성찰하고 시대적 사명에 대한 다양한 응답을 모색하는 과정이었다. 이 시기의 갈등과 다원화는 단순한 혼란기가 아니라, 21세기 한국 기독교의 역동성, 세계적 영향력, 내부적 분열, 그리고 정치적 열정이라는 복합적 DNA가 단련된 바로 그 도가니였다고 평가할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