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교회사

3.1운동 이후 한국 기독교의 흐름: 주요 동향 및 신학 논쟁 종합 분석

제이람 2025. 11. 4. 13:40

  3.1운동이 독립 쟁취라는 직접적인 목표 달성에 실패하자, 한국 기독교는 깊은 좌절감 속에서 두 가지 주요 흐름으로 나뉘게 되었다. 첫 번째는 암울한 현실을 초월하여 영적 체험과 내세에 집중하는 초월적 신비주의 운동이다. 이 흐름은 길선주의 '말세학' 사경회, 김익두의 신유 집회, 이용도의 신비주의적 영성 운동으로 대표된다. 두 번째는 현실 문제에 적극적으로 참여하여 민족의 역량을 강화하려는 현실적 계몽주의 운동이다. 이는 일제의 민족 말살 정책에 맞서 절제 운동, 공창 폐지 운동, 농촌 운동 등을 통해 민족의 정신적·물질적 자립을 도모했다.

 

  이와 동시에 한국 기독교는 외부 사상의 도전에 직면했다. 러시아 혁명의 영향으로 유입된 사회주의 및 공산주의는 무신론적 이념을 바탕으로 기독교와 충돌했으며, 특히 만주와 간도 지역에서는 기독교인에 대한 박해로 이어졌다. 또한, 일본의 우치무라 간조에게 영향을 받은 김교신을 중심으로 제도권 교회를 비판하며 '성서 중심의 조선적 기독교'를 추구하는 무교회주의 운동이 전개되었다.

 

  내부적으로는 서구에서 유입된 자유주의 신학(신신학)이 큰 파장을 일으켰다. 신흥우 중심의 '적극신앙단'은 선교사 중심의 교권과 보수 신학, 서북 지역 편중의 기독교계 구조에 문제를 제기했다. 장로교 내에서는 모세오경 저작권, 여성 교역자 문제, 아빙돈 단권 주석 번역 참여 등을 둘러싸고 신학 논쟁이 격화되었다. 이러한 대립은 '한국 보수신학의 아버지' 박형룡과 '한국 자유주의 신학의 아버지' 김재준의 신학 논쟁에서 정점을 이루며, 이후 한국 장로교 분열의 사상적 배경이 되었다.

1. 3.1운동 이후 기독교의 두 가지 흐름

  3.1운동의 실패는 민족 전체에 큰 실망감을 안겨주었다. 독립이 요원해 보이는 현실 속에서 기독교인들은 새로운 방향을 모색했고, 이는 크게 현실을 초월하려는 신비주의적 흐름과 현실을 개혁하려는 계몽주의적 흐름으로 나타났다.

1.1. 초월적 신비주의 운동

  현실 세계에 대한 소망을 잃은 많은 이들이 초자연적인 하나님의 역사와 내세에 대한 소망에 집중했다. 이는 개인의 영적 체험을 강조하는 부흥 운동의 형태로 전개되었다.

길선주의 사경회 운동

  • 배경: 민족대표 33인 중 한 명이었던 길선주(1869-1935) 목사는 3.1운동으로 약 2년간 옥고를 치렀다.
  • 말세학(末世學) 연구: 옥중에서 요한계시록을 수백 독(많게는 1만 독까지 언급됨)하며 깊이 연구하여, 이를 바탕으로 계시록 강해집인 『말세학』을 저술했다.
  • 독특한 종말론: 그의 종말론은 당시 서구의 역사적 전천년설과 달리, 이 땅이 완전히 불타 없어지는 것이 아니라 '삼천리반도 금수강산'은 하나님께서 보존하시고 회복시켜 지상낙원으로 만드실 것이라는 독특한 신앙을 담고 있었다. 이는 일제 치하의 민족에게 이 땅에 대한 소망과 민족적 자긍심을 심어주는 역할을 했다.
  • 사경회 인도: 출옥 후 『말세학』을 중심으로 사경회(말씀을 깊이 연구하고 해석하는 집회)를 인도하며 교인들에게 재림 신앙과 새 하늘과 새 땅에 대한 소망을 전파했다.

김익두의 이적 집회

  • 배경: 본래 황해도 안악의 상인이었으나 장사 실패 후 시장 상인들을 괴롭히는 유명한 깡패('김내놔'라는 별명)였다. 여성 선교사의 전도를 받고 회심하여 신앙인이 되었다.
  • 신유 은사: 철저한 신앙생활과 기도 끝에 신유의 은사를 받아, 이적과 기사를 통해 병자를 치유하는 집회를 인도하기 시작했다.
  • 주요 이적 사례
    • 박수진 치유: 경북 현풍교회 사경회에서 사고로 아래턱이 처진 여성 박수진을 기도로 치유하여 정상적으로 말하고 식사할 수 있게 했다.
    • 기타: 곱사등이 펴지고, 중풍병자, 소경, 벙어리 등이 치유되는 역사가 전국 각지에서 일어났다. 그의 사역을 통해 치유받은 사람은 1만여 명에 달하는 것으로 기록된다.
  • 시대적 의미: 김익두의 이적 집회는 3.1운동 실패와 일제의 억압으로 절망에 빠진 민중에게 하나님의 초자연적 능력을 통해 삶의 용기와 위로를 주었으며, 한국 교회에 영적 생명력을 불어넣었다는 평가를 받는다.
  • 시련과 순교: 신사참배 강요에 저항하다 모진 고문을 당했으며, 해방 후에는 공산 정권의 어용 단체인 '조선기독교연맹'의 초대 회장으로 추대되기도 했다. 그러나 그는 김일성에게도 복음을 전하는 담대함을 보였고, 6.25 전쟁 중 후퇴하던 인민군에 의해 1950년 10월 14일 살해당하여 순교했다.

이용도의 신비주의 운동

  • 배경: 황해도 출신으로, 19세에 3.1운동에 가담하여 2년간 옥살이를 했다. 이후 협성신학교에 입학했으나 폐병 3기로 학업을 중단하고 요양해야 했다.
  • 영적 체험: 요양 중 부흥회를 인도하며 강단에서 하염없이 눈물을 쏟는 등 깊은 신비적 체험을 했다. 그의 눈물은 집회에 참석한 모든 이들에게 전염되어 '눈물의 집회'가 되었다.
  • 그리스도와의 합일 추구: "예수에게 미쳐야 하겠나이다"라고 고백하며, 자신의 인격이 그리스도의 인격으로 변화되는 완전한 영적 합일을 추구했다.
  • 이단 정죄: 신들린 여성 신자 유명화(직접 계시 주장)에게 "주여"라고 부르며 엎드린 사건이 문제가 되어, 1932년 장로교 총회에서 이단으로 정죄받았고 감리교에서도 정직 처분을 받았다.
  • 말년: 공식적인 강단에서 배척당한 후, 한 집회에서 이단이라는 이유로 교인들에게 폭행당하는 수모를 겪었다. 이로 인해 건강이 급격히 악화되어 1933년, 33세의 젊은 나이로 세상을 떠났다.

1.2. 현실적 계몽주의 운동

  일제가 '문화 정치'를 표방하며 술, 담배, 아편, 공창 등을 권장하여 민족정신을 타락시키려 하자, 기독교는 이에 맞서 민족을 일깨우고 사회를 정화하는 계몽 운동을 주도했다.

절제 운동

  • 배경: 1923년 세계기독교여자절제회 소속 크리스틴 틴링(Christine Tinling)의 방한을 계기로 전국적인 절제 운동이 시작되었다.
  • 조직 결성: 1924년 '조선여자절제회 연합회'가 창립되어 금주 운동에 역점을 두었다.
  • 금주가(禁酒歌): 1931년 발행된 『신정찬송가』에 금주가가 수록되었다. 이 노래는 단순한 절주 권장을 넘어, 술값으로 학교를 세워 자녀를 교육하고 국가를 위해 일하자는 민족 계몽적인 내용을 담고 있었다. 당시 술과 담배는 총독부의 전매 사업이었기에, 금주 운동은 일제에 대한 경제적·민족적 저항 운동의 성격을 띠었다.
가사
1절 금수강산 내 동포여 술을 입에 대지 말라 건강 지력 손상하니 천치 될까 늘 두렵다
2절 패가망신 될 독주는 빚도 내서 마시면서 자녀 교육 위하야는 일전 한푼 안 쓰려네
3절 전국 술값 다 합하야 곳곳마다 학교세워 자녀 수양 늘 식히면 동서문명 잘 빛내리
4절 천부 주신 네 재능과 부모님께 받은 귀체 술의 독기 받지 말고 국가 위해 일할지라
후렴 아~~ 마시지 마라 그 술 아~~ 보지도 마라 그 술 조선 사회 복 받기는 금주함에 있나니라
  • 색옷 입기 운동: '백의민족'의 전통이었던 흰옷이 쉽게 더러워져 물자와 시간이 낭비된다는 인식하에, 물자 절약을 위해 색깔 있는 옷을 입자는 운동도 전개되었다.

공창 폐지 및 농촌 운동

  • 공창 폐지 운동: 교회는 '공창폐지위원회'를 조직하여 일본이 공인한 사창가 제도 폐지를 위해 노력했다.
  • 농촌 운동: 1920년대 전체 인구의 80%를 차지하던 농촌은 일제의 경제 침탈로 피폐해졌다.
    • 활동 내용: 선교사 러츠(Lutz)가 윤작제 등 농사 기술 개량을 지도했고, YMCA는 문맹 퇴치, 농사 개량, 협동정신 함양을 3대 목표로 삼고 농촌 계몽에 앞장섰다.
    • 탄압: 활발히 전개되던 농촌 운동은 1938년 일제가 '농우회 사건'을 조작하여 관련 지도자들을 대거 체포하면서 위축되었다.

2. 외부 사상과의 대립

  한국 기독교는 일제의 식민 통치 외에도 새로운 외부 사상의 도전에 직면했다.

2.1. 사회주의 및 공산주의의 도전

  • 사상적 배경: 1917년 러시아 볼셰비키 혁명의 성공은 '프롤레타리아 혁명' 사상을 전파했다. 이는 제국주의(부르주아 국가)에 억압받는 식민지(프롤레타리아 민족)의 독립운동가들에게 큰 영감을 주었다.
  • 기독교와의 충돌: 그러나 유물론과 무신론에 기반한 공산주의는 기독교와 근본적으로 대립할 수밖에 없었다.
  • 기독교 박해: 1925년 조선공산당이 창당된 이후, 공산주의자들은 점차 세력을 확장하며 기독교를 주적으로 삼고 박해하기 시작했다. 특히 공산주의 영향력이 강했던 북간도 지역에서 박해가 심했다.
    • 동아기독교(침례교) 박해: 1925년, 중국 길림성에서 선교하던 윤학영 등 4명의 침례교인을 '일제의 밀정'으로 몰아 살해했다.
    • 간도 지역 박해: 1932년, 간도에서 김영진 목사와 김영국 장로 형제를 공산주의자들이 마을 사람들을 모아놓고 신앙을 지킨다는 이유로 가죽을 벗겨 죽이는 만행을 저질렀다.

2.2. 무교회주의 운동

  • 주요 인물: 김교신(1901-1945)이 일본 유학 중 우치무라 간조(内村鑑三)를 만나 그의 사상에 깊은 영향을 받았다.
  • 성서조선(聖書朝鮮) 창간: 1927년 귀국 후 함석헌 등과 함께 성경 연구 잡지인 『성서조선』을 창간했다. 그의 목표는 "새로운 조선을 성서 위에 세우자"는 것이었다.
  • 운동의 특징
    1. 반(反)교회제도: 기성 교회의 교리, 예식, 교단, 성직자 계급 등을 부정하고, 신자들만의 신앙 공동체를 형성하여 성서 본문 연구에 집중했다. 이는 '무교회'라기보다는 '무교단' 운동에 가까웠다.
    2. 민족주의적 성향: 하나님이 민족에게 주신 사명을 강조하며 '조선적인 기독교' 설립을 추구했다. 이는 점차 서구 선교사들의 영향력에서 벗어나려는 '반선교사 운동'으로 발전했다.
  • 탄압: 1942년 3월, 『성서조선』에 실린 권두언 「조와(弔蛙)」(개구리의 죽음을 애도함)가 문제가 되었다. 혹한에 얼어 죽은 개구리들을 애도하며 "아, 전멸은 면했나 보다!"라고 쓴 이 글이, 일제의 탄압 속에서도 민족정신은 살아있다는 의미로 해석되어 관련자들이 모두 체포되고 잡지는 폐간되었다.

3. 내부 신학 논쟁의 심화

  일본과 미국 유학파들을 통해 자유주의 신학(신신학)이 국내에 소개되면서, 전통적인 보수 신앙을 지켜온 한국 교회, 특히 장로교 내에서 극심한 신학 논쟁이 벌어졌다.

3.1. 자유주의 신학의 대두와 적극신앙단

  • 적극신앙단 운동 (1932): YMCA 총무 신흥우를 중심으로 조직된 이 운동은 민족주의적 색채와 자유주의 신학을 배경으로 했다.
  • 주요 주장: '반서북(反西北)', '반선교사(反宣敎師)', '반보수(反保守)'를 내걸었다.
    • 반서북: 교계의 주도권을 장악한 평안도·황해도 출신(서북) 세력에 대한 서울 중심 세력의 반발.
    • 반선교사: 한국 교회가 성숙했으므로 선교사 중심의 기득권 구조에서 벗어나야 한다는 주장.
    • 반보수: 서구 신학을 그대로 수용하기보다 한국 상황에 맞는 '토착화 신학'을 발전시켜야 한다는 진보적 입장.
  • 의의: 비록 큰 성공을 거두지 못하고 비밀 결사 형태로 변했지만, 한국 기독교의 고질적인 병폐였던 지역주의와 선교사 중심의 기득권 문제를 처음으로 공론화했다는 데 의의가 있다.

3.2. 장로교 내 신학 논쟁

  감리교는 신학적 포용성이 넓어 큰 논쟁이 없었으나, 보수 신학이 확고했던 장로교에서는 신신학의 영향으로 여러 논쟁이 발생했다.

사건 주요 내용 결과
창세기 저작권과 여성 문제 (1934-1935) - 김영주 목사가 모세의 창세기 저작권을 부인함.
- 김춘배 목사가 "여자는 교회에서 잠잠하라"는 구절의 문자적 해석에 반대하며 여성의 교권을 주장함.
1935년 제24차 총회에서 관련자들의 주장을 '신조 위반'으로 규정하고 처벌을 결의하자, 당사자들이 사과하며 일단락됨.
아빙돈 단권 주석 문제 (1935) 감리교가 선교 50주년 기념사업으로 출판한 아빙돈 단권 주석은 신학적으로 진보적인 입장을 담고 있었음. 이 주석의 번역에 다수의 장로교 목사들이 참여한 것이 문제 됨. 길선주 목사의 제의로 총회는 이 주석을 장로교 교리에 위배되는 것으로 규정하고 구독 금지를 결의함. 번역에 참여했던 목사들은 사과함.

3.3. 박형룡 대 김재준: 보수와 진보의 대립

  이 시기 신학 논쟁은 한국 교회의 두 거목, 박형룡과 김재준의 대립으로 집약된다.

죽산 박형룡 (1897-1978) - 한국 보수신학의 아버지

  • 학문적 배경: 미국 프린스턴 신학교에서 공부하며, 당시 근본주의 논쟁의 중심에 있던 그레샴 메이첸(J. Gresham Machen)에게 직접 배웠다. 이를 통해 철저한 보수·정통주의 신학을 확립했다.
  • 주요 활동: 평양신학교 교수로 재직하며 후학을 양성했다. 한국인 최초의 조직신학 저서인 『기독교 근대신학 난제 선평』을 저술하여 자유주의 신학의 도전에 체계적으로 대응했다. 그의 호 '죽산(竹山)'은 대나무처럼 굳고 올곧은 그의 신학적 입장을 상징한다.

장공 김재준 (1901-1987) - 한국 자유주의 신학의 아버지

  • 학문적 배경: 일본 청산학원에서 칼 바르트 등의 신정통주의 신학을 접했으며, 미국 웨스턴 신학교에서 공부하며 진보적 신학 사상을 수용했다.
  • 주요 주장: 「이사야의 임마누엘 예언 연구」 등의 논문을 통해 성경의 축자영감설을 거부하고, 성경 해석에 있어 역사비평적 방법을 도입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그의 호 '장공(長空)'은 교리에 얽매이지 않고 하늘처럼 넓고 자유로운 신학을 추구했던 그의 성향을 보여준다.

  이 두 인물의 신학적 대립은 1930년대에 시작되어 해방 이후까지 이어졌으며, 결국 한국장로교회가 보수적인 대한예수교장로회(예장)와 진보적인 한국기독교장로회(기장)로 분열되는 결정적인 원인이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