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교회사

3.1운동 이후, 한국 기독교는 어디로 향했는가: 주요 사건으로 본 갈등과 모색의 역사

제이람 2025. 11. 4. 15:44

희망과 절망의 갈림길에서

  3.1 만세운동의 함성은 거셌지만, 돌아온 것은 독립의 기쁨이 아닌 깊은 실망과 좌절감이었습니다. 수많은 희생을 치렀음에도 현실은 변하지 않았고, '독립은 불가능한 꿈일까?'라는 무거운 질문이 민족 전체를 짓눌렀습니다. 이 암울한 현실 속에서 한국 기독교는 중대한 갈림길에 섰습니다.

 

  어떤 이들은 더 이상 소망 없는 이 땅을 넘어 하늘의 위로를 구했습니다. 기적과 신비로운 체험을 통해 초월적인 희망을 찾으려 했습니다. 이를 '초월적 신비주의'의 흐름이라 부를 수 있습니다.

 

  반면, 다른 이들은 "아니야, 그래도 이 현실 속에서 우리가 해야 할 일이 있다"고 외쳤습니다. 타락해가는 민족의 정신을 일깨우고, 실력을 키워 언젠가 다가올 해방의 날을 준비해야 한다고 믿었습니다. 이는 '현실적 계몽주의'라는 또 다른 큰 흐름을 형성했습니다.

 

  이 글은 3.1운동 이후 한국 기독교가 걸어간 두 갈래의 길, 그 속에서 벌어졌던 치열한 고민과 갈등의 역사를 주요 사건과 인물을 통해 풀어보고자 합니다.

1부: 현실을 넘어 하늘의 소망을 찾다 (초월적 신비주의 운동)

  절망적인 현실 속에서 많은 이들은 땅이 아닌 하늘에서 소망을 찾고자 했습니다. 이들의 신앙은 신비로운 체험과 기적, 그리고 다가올 하나님 나라에 대한 강렬한 기대를 통해 민중의 아픈 마음을 위로했습니다.

1. 길선주: 한반도에서 지상낙원을 꿈꾼 종말론

  민족대표 33인 중 한 명이었던 길선주 목사는 3.1운동으로 2년간 옥고를 치렀습니다. 그는 차가운 감옥 안에서 절망하는 대신, 요한계시록을 수백 번 이상 읽으며 깊이 묵상했고, 이 과정을 통해 '말세학(末世學)'이라는 독특한 종말론을 정립했습니다.

 

  그의 종말론은 당시 서구 선교사들이 가르친 일반적인 종말론과 근본적으로 달랐습니다. 이는 죄악으로 가득 찬 이 세상이 심판의 불로 완전히 소멸될 것이라는 서구 선교사들의 지배적인 종말론에서 급진적으로 벗어난 것이었습니다. 길선주는 "이 땅, 우리가 살아가는 한반도 삼천리 금수강산은 결코 불타 없어지지 않고, 오히려 새롭게 회복되어 지상낙원이 될 것"이라고 선포했습니다. 길선주의 비전은 일본에 빼앗긴 바로 그 땅에 신성하고 영원한 의미를 부여함으로써, 종말론을 현실로부터의 '도피 신학'에서 '민족적 희망과 인내의 신학'으로 바꾸어 놓았습니다.

 

  이 메시지는 3.1운동의 실패로 모든 것을 잃었다고 생각했던 민족에게 엄청난 희망이었습니다. 일제에 빼앗긴 이 땅이 버려지는 곳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영원히 보존하고 회복시켜 주실 약속의 땅이라는 그의 해석은 나라 잃은 백성에게 큰 위로와 자긍심을 주었습니다.

2. 김익두: 기적과 치유로 민중을 위로한 부흥사

  김익두 목사의 삶은 한 편의 드라마와 같습니다. 그는 원래 장사에 실패한 뒤 시장 상인들을 괴롭히던 악명 높은 깡패였습니다. 그런 그가 한 여성 선교사의 끈질긴 전도로 예수를 믿게 된 후, 180도 다른 사람이 되었습니다.

 

  그의 사역을 상징하는 것은 '신유(神癒)', 즉 기도를 통한 치유의 기적이었습니다. 특히 경북 현풍교회 집회에서 사고로 아래턱이 빠져 제대로 먹지도 말하지도 못하던 박수진이라는 여인을 치유한 사건은 전국적으로 큰 화제가 되었습니다. 그의 부흥회마다 놀라운 이적들이 나타났고, 일제의 억압 속에서 병들고 가난했던 민중에게 김익두의 이적 집회는 초자연적인 하나님의 능력을 직접 체험하는 통로였습니다. 이는 한국 교회에 '영적인 생명력'을 불어넣었고, 희망을 잃은 사람들에게 '삶의 용기'를 주었습니다.

 

  그는 훗날 신사참배 강요에 맞서 모진 고문을 당하면서도 신앙을 지켰습니다. 그러나 그의 말년은 복잡했습니다. 해방 이후, 그는 북한의 국가 통제하에 설립된 조선기독교연맹의 초대 회장으로 추대되었고, 그 지위를 이용해 김일성에게 복음을 전하기도 했습니다. 그는 결국 6.25 전쟁 중 공산군에 의해 순교했습니다.

3. 이용도: '예수에게 미치다'를 외친 신비주의자

  "아버지여, 예수에게 아주 미쳐버릴 혼을 넣어 주소서. 예수에게 미쳐야 하겠나이다!"

 

  이는 폐병 3기의 시한부 인생을 살던 젊은 목회자 이용도의 절절한 고백이었습니다. 그는 3.1운동에 참여해 옥살이를 한 뒤 신학교에 입학했지만, 건강 악화로 요양을 떠나야 했습니다. 그곳에서 인도한 부흥회에서 그는 말로 설명할 수 없는 깊은 신비적 체험을 합니다. 설교자도, 성도들도 하염없이 눈물만 흘렸던 이 '눈물의 부흥회'를 통해 그는 새로운 사역의 길로 들어섭니다.

 

  그가 외친 '예수에게 미친다'는 것은 '그리스도와의 합일(合一)'을 의미했습니다. 자신의 인격이 사라지고 오직 예수의 인격으로 변화되는 완전한 일치를 추구한 것입니다. 그의 뜨거운 집회는 교파를 넘어 많은 사람들에게 깊은 감동을 주었지만, 그의 신비주의는 기성 교단과 갈등을 빚었습니다. 특히 신들렸다고 알려진 유명화라는 여성에게 '주여'라고 부른 사건은 그가 이단으로 정죄받는 결정적 계기가 되었습니다. 결국 교단에서 쫓겨난 그는 1933년 33세의 젊은 나이로 세상을 떠났습니다.

 

  길선주, 김익두, 이용도. 이 세 인물은 각기 다른 방식으로 암울한 시대에 영적인 위안과 초월적 희망을 제시했습니다. 하지만 이러한 신비주의 운동은 현실의 고통스러운 문제에서 눈을 돌리게 한다는 비판에 직면하기도 했습니다. 이제, 기독교가 민족의 현실 문제에 직접 뛰어들어 개혁을 외쳤던 또 다른 흐름을 살펴보겠습니다.

2부: 민족의 현실을 개혁하려다 (현실적 계몽주의 운동)

  신비주의가 하늘을 향했다면, 계몽주의는 땅을 향했습니다. 일부 기독교인들은 일제의 민족 말살 정책에 맞서 사회를 정화하고 민족의 역량을 키우는 것이야말로 기독교의 중요한 사명이라고 믿었습니다.

1. 시대적 배경: 일제의 문화 통치와 민족 말살 정책

  3.1운동 이후, 일제는 무력으로 억누르는 '무단 통치'에서 유화책처럼 보이는 '문화 정치'로 통치 방식을 바꿉니다. 언론, 집회의 자유를 일부 허용하는 등 겉으로는 부드러워 보였지만, 그 실체는 더욱 교묘한 '민족 말살 정책'이었습니다.

 

  일제는 술, 담배, 아편 사용을 은근히 권장하고 공창(공인된 사창가)을 운영하여 한국 청년들의 정신을 타락시키려 했습니다. 민족정신이 무너지면 저항 의지도 사라질 것이라는 계산이었습니다. 이러한 정신적 침략에 가장 민감하게 반응하고 조직적으로 저항한 집단이 바로 기독교였습니다.

2. 금주 운동: 단순한 절제를 넘어선 민족 저항

  1923년, 세계기독교 여자 절제회(World's WCTU)의 영향을 받아 '조선여자절제회 연합회'가 창립되면서 금주 운동이 본격적으로 시작되었습니다. 이 운동은 단순한 생활 개선 캠페인을 넘어섰으며, 당시 찬송가에도 실릴 만큼 널리 불렸던 '금주가(禁酒歌)'의 가사에 그 정신이 잘 나타나 있습니다.

 

금주가 (禁酒歌)

1절. 금수강산 내 동포여 술을 입에 대지 말라 / 건강 지력 손상하니 천치 될까 늘 두렵다

2절. 패가망신 될 독주는 빗도 내서 마시면서 / 자녀 교육 위하야는 일전 한푼 안 쓰려네

3절. 전국 술값 다 합하야 곳곳마다 학교세워 / 자녀 수양 늘 식히면 동서문명 잘 빗내리

4절. 천부 주신 네 재능과 부모님께 밧은 귀체 / 술의 독기 밧지 말고 국가 위해 일할지라

후렴. 아~~ 마시지 마라 그 술 아~~ 보지도 마라 그 술 / 조선 사회 복 받기는 금주함에 잇나니라

 

  이 노래는 개인의 건강(1절)과 가정 경제(2절)를 넘어, 술 마실 돈을 모아 학교를 세워 민족의 미래를 준비하고(3절), 건강한 몸과 정신으로 국가에 헌신하자(4절)는 강력한 사회 개혁 메시지를 담고 있습니다.

 

  무엇보다 중요한 사실은 당시 술과 담배는 조선총독부가 직접 관리하는 전매 사업이었다는 점입니다. 따라서 술을 마시지 않는 것은 곧 총독부의 재정에 타격을 주는 행위이자, 일제의 민족 타락 정책에 정면으로 맞서는 '민족 저항 운동'으로 인식되었습니다.

3. 농촌 운동: 민족의 80%를 위한 노력과 한계

  1920년대 한국 인구의 약 80%는 농민이었습니다. 하지만 일제의 경제적 침탈로 대다수 농민은 극심한 빈곤에 시달렸습니다. 이에 YMCA와 같은 기독교 단체들은 피폐해진 농촌을 살리기 위한 운동을 주도했습니다. 이들의 핵심 목표는 세 가지였습니다.

  • 문맹 퇴치: 글을 가르쳐 농민들을 깨우친다.
  • 농사 개량: 선진 농업 기술을 보급하여 생산성을 높인다.
  • 협동 정신: 협동조합 등을 통해 공동으로 어려움을 극복한다.

  이러한 노력은 농촌 사회에 새로운 활력을 불어넣었지만, 일제의 탄압이라는 한계에 부딪혔습니다. 1938년, 일제는 농촌 운동 단체였던 '농우회' 회원들을 독립운동 혐의로 대거 체포하는 '농우회 사건'을 일으켰고, 이로 인해 기독교의 농촌 운동은 크게 위축되었습니다.

 

  금주 운동과 농촌 운동은 기독교가 민족의 현실 문제에 깊이 참여하며 사회적 책임을 다하려 했던 중요한 노력이었습니다. 하지만 이러한 내부적 노력 외에도, 외부에서 밀려온 새로운 사상들은 한국 기독교에 또 다른 차원의 도전과 변화를 요구하고 있었습니다.

3부: 새로운 사상, 새로운 기독교를 향한 모색

  20세기 초, 세계를 뒤흔든 새로운 사상들이 한반도에도 상륙했습니다. 이는 한국 기독교의 정체성에 근본적인 질문을 던지며 새로운 형태의 신앙 운동과 격렬한 충돌을 낳았습니다.

1. 김교신과 무교회주의: "성서 위에 새로운 조선을"

  일본 유학 중 기독교인이 된 김교신은 일본의 대표적인 무교회주의자 우치무라 간조의 영향을 받아 '조선적인 기독교'를 세워야 한다는 사명감에 불타올랐습니다. 1927년, 그는 함석헌 등 동지들과 함께 '성서조선(聖書朝鮮)'이라는 잡지를 창간하며 "새로운 조선을 성서 위에 세우자"고 외쳤습니다.

 

  '성서조선'은 1942년 3월, 권두언으로 실린 '조와(弔蛙, 개구리의 죽음을 애도함)'라는 글 때문에 폐간됩니다. 이 글은 혹독한 겨울 추위에 얼어 죽은 개구리들을 애도하는 짧은 글이지만, 그 안에는 깊은 민족정신이 담겨 있었습니다. 그 마지막 문장은 "…동사한 개구리 시체를 모아 매장하여 주고 보니, 담저(潭底)에 아직 두어 마리 기어다닌다. 아, 전멸은 면했나 보다!"였습니다.

 

  여기서 '비상한 혹한'은 일제의 가혹한 탄압을 상징했고, "전멸은 면했나 보다!"라는 외침은 어떤 핍박 속에서도 결코 꺼지지 않는 민족의 생명력이 살아있음을 선언하는 것이었습니다. 일제는 이 글의 숨은 의도를 파악하고 김교신과 동지들을 체포했습니다.

 

  김교신이 추구한 무교회주의 운동의 핵심 특징은 다음과 같습니다.

  1. 제도화된 교단·교파 거부 (무교단주의): 교단, 교리, 성직자 중심의 예식 등 제도화된 교회를 비판하고, 평신도들이 직접 모여 성경을 연구하는 순수한 신앙 공동체(에클레시아)를 추구했습니다.
  2. 민족 사명 강조: 하나님이 각 민족에게 주신 고유한 사명이 있다고 믿으며, 기독교 신앙을 통해 민족정신을 바로 세우는 것을 중요하게 여겼습니다.

2. 사회주의의 도전과 기독교의 수난

  1917년 러시아 혁명 이후, 사회주의 사상은 '억압받는 민족의 해방'이라는 구호와 맞물려 많은 독립운동가들에게 새로운 희망으로 다가왔습니다. 하지만 '무신론(無神論)'을 근본 이념으로 삼는 사회주의는 유신론(有神論)에 기반한 기독교와 본질적으로 충돌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처음에는 독립이라는 공동 목표 아래 협력하기도 했지만, 사회주의자들이 세력을 얻기 시작하면서 갈등은 피할 수 없게 되었습니다. 특히 만주와 간도 등지에서 활동하던 사회주의자들은 기독교인들을 '일제의 밀정' 또는 '인민의 아편'으로 몰아 잔혹하게 박해했습니다.

  • 동아기독교(침례교) 박해 사건 (1925): 중국 길림성에서 활동하던 윤학영 선교사를 포함한 4명의 기독교인을 '일제의 밀정'이라는 누명을 씌워 살해했습니다.
  • 김영진 목사 형제 사건 (1932): 간도에서 목회하던 김영진 목사와 그의 형 김영국 장로에게 기독교와 공산주의 중 하나를 선택하라고 강요한 뒤, 예수를 믿겠다고 고백하자 가죽을 벗겨 죽이는 만행을 저질렀습니다.

  무교회주의와 사회주의라는 새로운 사상의 등장은 한국 기독교가 '교회란 무엇인가', '민족 속에서 기독교의 역할은 무엇인가'라는 정체성에 대한 깊은 고민을 하도록 만들었습니다. 이러한 외부의 도전은 기독교 내부, 특히 가장 큰 교세를 가졌던 장로교 안에서 신학적 입장 차이를 둘러싼 격렬한 논쟁으로 이어졌습니다.

4부: 분열의 전주곡, 신학 논쟁의 시작

  외부의 도전과 내부의 성찰은 한국 기독교, 특히 장로교 내부에 잠재해 있던 신학적 갈등을 수면 위로 끌어올렸습니다. 이는 단순한 학문적 논쟁을 넘어, 훗날 한국 장로교 분열의 씨앗이 되었습니다.

1. 보수 신앙에 대한 첫 도전들

  당시 한국 기독교의 주류였던 보수적 신앙에 정면으로 도전하는 두 가지 중요한 사건이 있었습니다.

  1. 적극신앙단 운동: YMCA 총무 신흥우를 중심으로 일어난 이 운동은 당시 한국 교회의 구조적 문제를 비판하며 반서북(反西北), 반선교사(反宣敎師), 반보수(反保守)라는 세 가지 핵심 구호를 내세웠습니다. 이는 각각 교권을 장악한 서북 지역 중심의 '지역주의', 선교사 중심의 '기득권', 그리고 한국 현실에 맞지 않는 경직된 신학에 대한 비판이었습니다.
  2. 아빙돈 단권 주석 문제: 1935년, 감리교에서 출판한 진보적 성격의 '아빙돈 단권 주석' 번역에 다수의 장로교 목사들이 참여하면서 큰 논란이 일었습니다. 보수 신앙을 가진 장로교 목사들이 신학적으로 진보적인 책의 번역에 참여한 것은 교단의 신앙 노선을 위배한 것이라는 비판이 거셌고, 이 사건은 한국 교회 내 보수와 진보 신학의 대립이 본격화되는 신호탄이 되었습니다.

2. 두 거인의 대립: 박형룡 vs. 김재준

  이러한 신학 논쟁의 중심에는 한국 보수신학과 진보신학을 대표하는 두 거두, 박형룡과 김재준이 있었습니다. 두 사람의 신학적 입장은 뚜렷한 대조를 이루었습니다.

구분 죽산 박형룡 (朴亨龍, 1897-1978) 장공 김재준 (金在俊, 1901-1987)
대표 별칭 한국 보수신학의 아버지 한국 자유주의 신학의 아버지
주요 유학배경 미국 프린스턴 신학교 (그레샴 메이첸에게 사사) 일본 청산학원, 미국 웨스턴 신학교 (신정통주의 영향)
핵심 성경관 성경의 모든 단어가 하나님의 영감으로 기록되었다는 축자영감설(逐字靈感說, a doctrine of verbal inerrancy)을 절대적으로 옹호 성경의 축자영감설을 거부하고, 비평적 연구를 수용

 

  이들의 대립은 단순히 '보수'와 '진보'의 구도가 아니었습니다. 박형룡이 성경의 모든 단어가 오류 없는 하나님의 말씀이라는 축자영감설을 절대적으로 수호하려 했다면, 김재준은 칼 바르트의 신정통주의 신학에 영향을 받아 제3의 길을 제시했습니다. 그는 성경이 인간의 오류를 포함한 역사적 문서이지만, 신앙의 응답을 통해 독자에게 '하나님의 말씀이 된다'고 주장했습니다. 이는 성경의 권위에 대한 근본적인 견해 차이였고, 두 사람의 격렬한 논쟁은 이후 한국 장로교 분열의 신학적 토대가 되었습니다.

 

  적극신앙단 운동에서부터 박형룡과 김재준의 논쟁에 이르기까지, 이 시기의 신학 논쟁들은 단순히 학문적 견해 차이를 넘어 한국 교회의 미래 방향을 결정하는 중대한 갈림길이었습니다. 이 갈등의 씨앗은 해방 이후 한국 장로교가 수많은 교단으로 나뉘는 역사의 직접적인 원인이 되었습니다.

갈등 속에서 피어난 한국 기독교의 다양성

  3.1운동 이후 해방 이전까지의 시기는 한국 기독교가 민족적 위기라는 거대한 파도 앞에서 자신의 정체성을 찾기 위해 가장 치열하게 모색하고 때로는 격렬하게 충돌했던 역동적인 시대였습니다.

 

  어떤 이들은 신비주의를 통해 하늘의 위로를 구했고, 어떤 이들은 계몽주의를 통해 땅의 현실을 바꾸려 했습니다. 무교회주의는 제도를 넘어 순수한 신앙과 민족의 사명을 외쳤고, 사회주의와의 충돌 속에서는 신앙의 본질을 피로써 증명해야 했습니다. 그리고 이 모든 과정은 신학 논쟁으로 이어지며 내부적인 정체성 투쟁을 겪었습니다.

 

  이 시기의 갈등은 나약함의 징표가 아니라, 한국 기독교가 자신만의 독특한 정체성을 단련해낸 용광로 그 자체였습니다. 초월적이면서 동시에 현실 참여적이고, 민족주의적이면서 동시에 보편적인 신앙을 추구했던 이 시기의 해결되지 않은 긴장감은 역사적 실패가 아니라, 오늘날 한국 교회의 역동적이고 때로는 모순적인 지형을 형성하는 근원적인 DNA로 남아 있습니다. 이 갈등의 역사는 한국 기독교의 현재를 이해하는 가장 중요한 열쇠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