믿음을 시험받던 암흑의 시대
우리 한국 교회의 역사에는 빛나는 승리의 순간도 있지만, 너무나 부끄러워 고개를 들기 힘든 시간도 있었습니다. 오늘 우리가 나눌 이야기는 바로 그 가장 어둡고 아팠던 시절의 이야기입니다.
일제강점기 말, 일본은 거대한 전쟁을 일으키며 조선의 정신마저 자신들의 지배 아래 두려 했습니다. 그 수단이 바로 '신사참배' 강요였습니다. 이는 단순히 고개를 숙여 절하는 행위가 아니었습니다. 일본의 천황을 신으로 섬기라는 명령이자, "나 외에는 다른 신들을 네게 두지 말라"는 하나님의 첫 번째 계명을 정면으로 부인하라는 시험대였습니다.
당시 신사참배의 압박은 우리 민족과 교회의 가장 깊은 곳까지 파고들었습니다.
- 일본의 의도: 일본은 아시아 대륙 침략 전쟁에 조선인들을 총동원하기 위해, 천황을 신으로 섬기게 하여 조선인의 정신을 '황국 신민(일본 제국의 신하 된 백성)'으로 완전히 바꾸려 했습니다.
- 압박의 확산: 처음에는 학교에서 시작된 이 강요는, 점차 모든 교회와 가정을 덮쳤습니다. 각 가정마다 '간이 신사'를 만들어 두고 '신궁대마'라는 부적을 모시도록 강요하여, 신앙의 양심을 피할 곳 없게 만들었습니다.
- 대부분의 굴복: 안타깝게도, 계속되는 탄압과 회유 앞에 대부분의 교단은 무너지고 말았습니다. 1938년, 장로회 총회마저 "신사참배는 종교의식이 아닌 국가의식"이라는 일본의 논리를 받아들이며 신사참배를 공식적으로 결의했습니다. 당시 "모든 교회가 신사참배를 했다고 해도 무방하다"고 할 만큼, 한국 교회 전체가 씻을 수 없는 죄를 짓고 말았습니다.
이처럼 모두가 '어쩔 수 없다'며 믿음의 길에서 돌아서던 시절, 칠흑 같은 어둠 속에서 홀로 등불을 들고 꿋꿋하게 자신의 믿음을 지키려 했던 한 사람이 있었습니다. 바로 주기철 목사님입니다.
1. 주기철 목사, 믿음의 뿌리를 내리다
주기철 목사의 불굴의 저항 정신은 그의 성장 과정에서부터 단단히 뿌리내리고 있었습니다. 그는 민족운동가 이승훈 장로가 세운 오산학교에서 공부하며 나라를 사랑하는 마음을 키웠습니다. 청년 시절에는 김익두 목사가 인도하는 부흥회에서 뜨거운 성령의 은혜를 체험하고, 자신의 삶을 온전히 하나님께 바치기로 결심하며 신학의 길로 들어섰습니다. 그의 마음속에는 나라를 향한 뜨거운 사랑과 하나님을 향한 굳건한 믿음이 함께 자라고 있었던 것입니다.
주기철 목사의 청년 시절 주요 이력은 다음과 같습니다.
| 시기 (Period) | 주요 내용 (Key Content) |
| 1897년 | 경남 창원에서 출생 |
| 청소년기 | 민족정신을 가르치는 오산학교에서 수학 |
| 청년기 | 김익두 목사의 부흥회에서 큰 은혜를 체험하고 신학 공부를 결심 |
| 목회 초기 | 부산 초량교회, 마산 문창교회 등에서 목회하며 신앙의 깊이를 더함 |
굳건한 믿음의 뿌리를 내린 주기철 목사님은 곧 그의 신앙 인생에서 가장 큰 시험대라 할 수 있는 평양으로 향하게 됩니다.
2. 평양에서의 외로운 싸움
1930년대 후반, 주기철 목사는 당시 한국 교회의 영적 중심지였던 평양 산정현교회에 부임하면서 신사참배 저항 운동의 가장 선두에 서게 되었습니다. 그의 저항이 시작되자, 상상할 수 없는 두 종류의 압박이 그를 덮쳐왔습니다.
- 일제의 탄압: 일제는 주기철 목사를 수시로 체포하여 감옥에 가두고 혹독한 고문을 가했습니다. 그의 육체를 파괴하여 신앙의 의지를 꺾으려 했던 것입니다.
- 동료들의 회유: 육체적 고통보다 더 그의 마음을 아프게 했던 것은 동료 목회자들의 외면과 회유였습니다. 당시 총회장이었던 홍택기 목사를 비롯한 교단의 지도자들은 앞장서서 신사참배를 결의하고 일본까지 건너가 참배했으며, 교회들은 '조선장로호'라는 이름의 전투기를 헌납하며 전쟁에 협력했습니다. 이런 상황 속에서 동료들은 주기철 목사를 찾아와 설득했습니다. "모든 총회가 따르기로 결정했는데 왜 당신만 거부하는가? 이 정도면 이것도 하나님의 뜻일 수 있지 않은가?" 모두가 등을 돌린 상황에서 홀로 믿음을 지켜야 했던 그의 싸움은 너무나도 외로웠습니다.
하지만 주기철 목사는 결코 흔들리지 않았습니다. 일제가 설교를 그만두라고 협박했을 때, 그는 단호하게 이렇게 외쳤습니다.
"나는 설교권을 하나님께 받은 것이니 하나님이 하지 말라고 하면 그만둘 것이요, 내 설교권을 경찰에서 받은 것이 아닌 즉 경찰서에서 하지 말라고 한다고 안할 수는 없소."
이 말은 "나의 주인은 일본 경찰이 아니라 오직 하나님 한 분뿐이다"라는 강력한 신앙고백이었습니다. 주기철 목사에게 설교는 직업이 아니라 하나님이 주신 거룩한 사명 그 자체였던 것입니다.
육체적, 정신적 압박이 극에 달했을 때, 그는 다시 감옥으로 향하기 전 마지막 기도로 자신의 모든 것을 하나님께 맡깁니다.
3. 마지막 기도, '나의 다섯 가지 소원'
주기철 목사는 감옥에 다시 끌려가기 전, '오종목의 나의 기원(나의 다섯 가지 소원)'이라는 제목으로 마지막 설교를 합니다. 이는 죽음을 눈앞에 둔 한 신앙인이 자신의 모든 것을 쏟아낸 간절한 기도이자 유언과도 같았습니다.
그의 다섯 가지 소원은 그가 겪고 있던 고통과 깊이 연결되어 있습니다.
- 죽음의 권세를 이기게 해주십시오.
- 이는 반복되는 고문 속에서 언제 닥칠지 모르는 죽음의 공포 앞에 비굴해지지 않을 용기를 구하는 기도였습니다.
- 오랜 고난을 견디게 해주십시오.
- 일제는 그의 정신을 무너뜨리기 위해, 죽기 직전까지 고문한 뒤 석방했다가 몸이 조금 회복되면 다시 잡아들이는 잔인한 방식을 반복했습니다. 이 기도는 끝없이 이어지는 고난 속에서 지치지 않고 믿음을 지킬 힘을 구하는 절규였습니다.
- 어머니와 아내, 자녀들을 주님께 맡깁니다.
- 일제가 그를 집에 보내 회복하게 한 것은 가족의 사랑을 보며 마음이 약해지기를 노린 심리전이었습니다. 이 기도는 남겨질 가족을 향한 사랑이자, 그들을 핑계로 타협하려는 유혹을 이겨내게 해달라는 간절한 부르짖음이었습니다.
- 의에 살고 의에 죽게 해주십시오.
- "이것도 하나님의 뜻일 수 있다"며 타협을 권유했던 동료들의 목소리 앞에서, 오직 옳은 길, 믿음의 길을 끝까지 가게 해달라는 굳은 다짐이었습니다.
- 내 영혼을 주님께 맡깁니다.
- 자신의 생명의 마지막 순간마저 온전히 하나님의 손에 맡기는 절대적인 믿음의 고백이었습니다.
이 기도를 마친 그는 마침내 신앙의 순수성을 지키기 위한 마지막 걸음을 내디뎠습니다.
4. 순교와 영원한 유산
주기철 목사는 6년이 넘는 시간 동안의 수감 생활 속에서 계속되는 고문과 회유를 모두 이겨냈습니다. 그리고 마침내 1944년 4월 21일, "하나님이여, 나를 붙드소서"라는 마지막 외침과 함께 47세의 나이로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았습니다.
그의 죽음은 결코 패배가 아니었습니다. 오히려 모두가 현실과 타협하며 신앙의 본질을 잃어가던 시대에, 자신의 목숨을 바쳐 '신앙의 순수성'을 지켜낸 위대한 승리였습니다. 모두가 "어쩔 수 없다"고 말하며 쉬운 길을 택할 때, 원칙을 지키는 한 사람의 삶이 얼마나 거룩하고 큰 울림을 줄 수 있는지를 그의 삶이 증명해 보였습니다.
주기철 목사님의 이야기는 오늘을 살아가는 우리에게 무엇을 묻고 있을까요? 만약 우리 시대에, 모두가 "어쩔 수 없다"고 말하는 거대한 흐름 앞에서 나의 믿음이 시험받는다면, 나는 과연 무엇을 지키기 위해 서 있을 것인지, 그의 삶은 우리 각자에게 깊은 질문을 던지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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