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사참배'란 무엇일까요?
만약 어느 날 갑자기 학교와 신앙, 혹은 목숨과 신념 사이에서 하나를 선택해야 한다면 여러분은 어떻게 하시겠어요? 이건 먼 나라의 이야기가 아닙니다. 1930년대, 우리와 같은 학생들이었던 한국의 십 대들에게 이것은 피할 수 없는 현실이었습니다.
'신사참배(神社參拜)'라는 말을 들으면 단순히 일본의 신사에 가서 절하는 모습이 떠오를지 모릅니다. 하지만 이는 일제가 한국인의 정신까지 지배하려 했던, 매우 강력하고 조직적인 민족 말살 정책의 심장이었습니다. 단순한 참배가 아니었던 이 문제는, 오늘날까지도 한국 기독교 역사에서 가장 중요하고 아픈 주제로 남아있습니다. 과연 신사참배는 어떤 배경에서 시작되었고, 왜 한국 사회, 특히 기독교에 이토록 깊은 상처를 남기게 되었을까요?
신사참배가 왜, 그리고 어떻게 시작되었는지 그 배경부터 차근차근 알아보겠습니다.
1. 신사참배는 왜 강요되었을까?: 일제의 야욕과 황국신민화 정책
1931년 만주사변, 1937년 중일전쟁을 일으키며 일본은 본격적으로 대륙 침략의 야욕을 드러냈습니다. 이때 일본은 한반도를 전쟁 물자와 인력을 공급하는 '전초기지'로 삼았죠. 하지만 전쟁을 효과적으로 수행하기 위해서는 물자뿐만 아니라, 한국인의 정신까지 완벽하게 통제할 필요가 있었습니다. 이를 위해 일제는 한국인의 정체성을 송두리째 흔드는 끔찍한 정책들을 밀어붙였습니다.
- 황국신민화 정책: 한국인을 일본 천황의 충성스러운 백성(皇國臣民)으로 만들려는 정책입니다. 이를 위해 매일 아침 '황국신민서사'라는 맹세를 외우게 하고, 한국인의 이름을 일본식으로 바꾸는 '창씨개명'을 강요했습니다.
- 내선일체(內鮮一體): 일본(內)과 조선(鮮)은 한 몸이라는 뜻으로, 한국의 민족 정체성을 없애고 일본에 완전히 동화시키려는 정책입니다.
- 신사참배: 일본의 건국신과 천황을 모신 '신사(神社)'에 절하게 함으로써, 한국인에게 일본의 국가 정신을 강요하는 가장 효과적인 수단이었습니다.
일제는 신사참배가 "종교가 아닌 국가 의식"이라고 주장하며 강요했습니다. 하지만 그 본질은 한국인의 민족정신을 뿌리 뽑고, 특히 유일신 신앙을 가진 기독교를 억압하려는 명백한 목적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이러한 일제의 정책은 가장 먼저 미래 세대를 교육하는 학교에 그 칼날을 겨누었습니다.
2. 학교에서 교회로: 전방위적인 신사참배 압박
신사참배를 하라는 위협은 학교에서 시작되었지만, 곧 바이러스처럼 퍼져나가 교회와 일반 가정까지 감염시켰습니다.
2.1. 학교를 향한 압박과 기독교 학교의 선택
1935년, 평안남도 지사는 공사립학교 교장 회의를 소집하여 모든 교장에게 평양 신사에 참배할 것을 강요했습니다. 이는 교육 현장에서 신사참배가 공식적으로 강요된 첫 사건이었습니다. 이때 선교사 맥쿤(McNair)과 스누크(Snook) 교장 등은 "신앙과 충돌한다"며 참배를 거부했습니다. 신앙적 양심의 문제에 부딪힌 기독교 계열 학교들은 서로 다른 선택의 기로에 놓였습니다.
| 교파 계열 | 대응 방식 | 핵심 이유 | 결과 |
| 장로교 (숭실학교, 숭의여중 등) | 폐교 신청 | "성경을 가르치지 못하고 우상숭배를 하느니 차라리 문을 닫겠다." | 자진 폐교 |
| 감리교/캐나다 선교회 | 신사참배 수용 | "어렵더라도 기독교 학교의 명맥을 유지하는 것이 낫다." | 학교 유지 |
이후 1938년에는 '조선교육령'이 개정되어 학교에서 우리말 사용까지 금지되었습니다. 학생들은 교실에서 모국어를 쓸 수 없었고, 교장들은 학교를 지키기 위해 이국의 신에게 머리를 숙여야 하는 암울한 상황이 계속되었습니다.
2.2. 교회를 향한 압박과 교단의 결정
1937년 중일전쟁 이후, 일제는 한국 사회 전체를 전쟁기지로 만들기 위해 신사참배 압박의 수위를 더욱 높였습니다. 모든 마을에 신사를 세우는 '1면 1신사 정책'을 폈고, 각 가정에 일본 신의 이름이 적힌 부적인 '신궁대마(神宮大麻)'를 두고 절하도록 강요했습니다.
이러한 압박 속에서 가톨릭, 감리교, 성결교 등 대부분의 교단은 결국 "신사참배는 국가 의식"이라는 일제의 논리를 받아들였습니다.
결국 끝까지 버티던 장로교마저 1938년 9월, 제27차 총회에서 신사참배를 공식적으로 결의하게 됩니다. 더욱 비극적인 것은, 신사참배를 결의해야 하는 이 총회에서도 총회장 자리를 차지하기 위한 후보자들의 경쟁이 있었다는 사실입니다. 회의장에는 총대(대의원)들 사이사이에 수많은 경찰이 앉아 삼엄한 감시를 펼쳤고, 선교사 블레어(방위량)가 유일하게 반대 의견을 냈지만 묵살당했습니다. 이때 발표된 결의문은 당시의 상황과 논리를 그대로 보여줍니다.
"아등(우리)은 신사는 종교가 아니고 기독교의 교리에 위반되지 않는 본의를 한번 더 이해하고 신사참배가 애국적 국가의식임을 자각하여 이에 신사참배를 솔선 여행하고..."
모두가 신사참배를 받아들이는 것처럼 보였던 암흑의 시대에도, 신앙의 순수성을 지키기 위해 목숨을 걸고 저항했던 사람들이 있었습니다.
3. 저항과 순교: 신앙의 순수성을 지킨 사람들
친구들, 선생님, 존경하는 목사님까지 모두가 "괜찮다"고 말하며 동참하는 상황을 상상해 보세요. 이때 혼자 "아니오"라고 말하는 것은 얼마나 어려웠을까요? 일제의 폭압적인 강요 속에서도 신앙의 양심을 지키기 위한 저항은 소수였지만 끈질기게 이어졌습니다.
3.1. 청원 운동과 반대 운동
박관준 장로와 안이숙 선생 같은 인물들은 국내에서의 저항이 한계에 부딪히자, 직접 일본으로 건너가 제국 의회 회의장에서 신사참배 강요의 부당함을 알리는 건의서를 뿌리며 용기 있는 저항을 시도했습니다.
이와 함께 주기철, 이기선, 한상동 목사 등을 중심으로 전국적인 저항 운동이 전개되었습니다. 그들은 다음과 같은 구체적인 행동 지침을 통해 신사참배를 거부했습니다.
- 신사참배를 죽음으로 거부할 것
- 자녀를 신사참배하는 학교에 입학시키지 말 것
- 신사참배에 동참하는 교회에 절대 출입하지 말 것
- 신사참배에 불참하는 동지들끼리 가정예배를 드릴 것
- 신앙의 동지들끼리 신령한 교회를 육성할 것
3.2. 순교자 주기철 목사의 '일사각오'
신사참배 저항 운동의 상징적인 인물은 단연 주기철 목사입니다. 평양 산정현교회에서 시무하던 그는 "우상에게 절할 수 없다"며 신사참배를 완강히 거부했습니다. 그의 저항 정신은 '일사각오(一死覺悟, 한 번 죽을 각오)'라는 제목의 유명한 설교에 잘 나타나 있습니다. 그는 "예수를 따라 일사각오", "남을 위하여 일사각오", "부활 진리를 위하여 일사각오"를 외치며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는 신앙을 역설했습니다.
일제가 설교를 금지시키려 하자 그는 이렇게 맞섰습니다.
"나는 설교권을 하나님께 받은 것이니 하나님이 하지 말라고 하면 그만둘 것이요, 내 설교권을 경찰에서 받은 것이 아닌 즉 경찰서에서 하지 말라고 한다고 안 할 수는 없소."
그의 권위가 오직 하나님으로부터 왔음을 분명히 한 것입니다. 일제는 주기철 목사를 회유하기 위해 잔인한 방법을 썼습니다. 그를 감옥에 끌고 가 죽기 직전까지 고문한 뒤, 집으로 돌려보내 가족의 따뜻한 보살핌 속에서 회복하게 했습니다. 그리고 몸이 좀 나아지면 다시 잡아들여 고문을 시작하는 과정을 반복했습니다. 한 번의 고통은 견딜 수 있어도, 끝나지 않는 고통과 회유의 반복은 사람의 영혼을 파괴하기 때문입니다.
마지막 설교였던 '오종목의 나의 기원'에서 그는 이렇게 기도했습니다. "죽음의 권세를 이기게 하옵소서. 장기의 고난(오랜 고난)을 견디게 하옵소서. 노모와 처자와 교우를 주님께 부탁합니다. 의에 살고 의에 죽게 하옵소서. 내 영혼을 주님께 부탁하나이다." 그는 결국 1944년 평양 감옥에서 순교하였습니다. 그의 저항은 암흑의 시대에 '기독교 신앙의 순수성'을 지키는 것이 무엇인지를 온몸으로 보여준 위대한 증거였습니다.
그러나 안타깝게도, 주기철 목사와 같은 저항은 소수였고, 대다수의 한국 교회는 일제의 압박 속에서 점차 변질되어 갔습니다.
4. 변절과 협력: 길을 잃은 한국 교회
신사참배에 저항하던 선교사들이 추방되면서, 외부의 보호막을 잃은 한국 교회는 일제의 전쟁 정책에 더욱 깊이 협력하는 길로 빠져들었습니다.
4.1. 선교사 추방과 교회의 고립
일제는 태평양 전쟁을 전후하여 미국, 캐나다 등 서양 선교사들을 '적성국가의 스파이'로 몰았습니다. 특히 1941년, 전 세계 기독교인들이 함께 지킨 '반전기도일'을 빌미 삼아 선교사들을 반국가적인 인물로 낙인찍고 강제로 추방했습니다. 맥쿤, 스누크처럼 신사참배에 처음으로 저항했던 바로 그 선교사들이 떠나야만 했던 것입니다. 1942년, 마지막 선교사였던 원한경(언더우드 가문)이 한국을 떠나면서 한국 교회는 외부 세계로부터 완전히 고립되었습니다.
4.2. 적극적인 친일 협력
보호막이 사라진 한국 교회는 신사참배를 넘어 일제의 전쟁 수행에 적극적으로 협력하는 단계에 이르렀습니다. 이는 한국 기독교 역사상 가장 가슴 아픈 장면들로 기록되어 있습니다.
- 물자 헌납: 예배의 시작을 알리던 교회 종을 녹여 무기를 만드는 데 바쳤고, 성도들의 헌금을 모아 '장로호', '감리교단호'라는 이름의 전투기를 구입해 헌납했습니다.
- 일본식 세례: 삼위일체 하나님의 이름이 아닌 일본의 신 '천조대신(天照大神)'의 이름으로 세례를 주는 '미소기하라이(禊祓)'라는 의식에 목사들이 직접 참여했습니다.
- 교파 통합: 1945년 7월, 일제는 모든 교단을 강제로 통합하여 '일본기독교 조선교단'이라는 단일 조직을 만들어 통제를 용이하게 했습니다.
- 신학교 변질: 자진 폐교했던 평양신학교를 친일 인사들을 중심으로 다시 열어, 황국신민화 정책에 부응하는 목회자를 양성하는 기관으로 변질시켰습니다.
이처럼 한국 교회는 해방 직전까지 깊은 어둠의 터널을 지나고 있었습니다. 해방은 이 모든 것을 어떻게 바꾸었을까요?
5. 해방 이후, 남겨진 과제
1945년 8월 15일, 해방은 기적처럼 찾아왔습니다. 일제는 감옥에 갇혀있던 신사참배 거부 지도자들을 8월 18일에 모두 처형할 계획이었으나, 사흘 먼저 찾아온 해방으로 이 끔찍한 계획은 무산되었습니다.
하지만 해방의 기쁨도 잠시, 한국 교회는 신사참배라는 과거사 문제를 놓고 깊은 갈등에 빠졌습니다. 신사참배에 참여했던 지도자들이 제대로 된 회개를 하지 않고 교권을 계속 유지하면서, 이를 비판하는 세력과 갈등을 빚었고 이는 오늘날까지 이어지는 장로교 교단 분열의 중요한 원인이 되었습니다.
오랜 시간이 지난 후, 한국 교회의 대표적인 지도자였던 한경직 목사가 개인 자격으로나마 공개적으로 신사참배의 죄를 고백한 것은, 이 문제가 한국 교회에 얼마나 깊고 아픈 상처로 남아 있는지를 보여주는 사건이었습니다.
우리가 신사참배 역사를 기억해야 하는 이유
일제 강점기 신사참배의 역사는 오늘을 살아가는 우리에게 무거운 질문과 함께 중요한 교훈을 남깁니다.
- 신앙의 본질이 무엇인지 끊임없이 고민해야 한다는 점입니다. 국가 권력의 이름으로 강요되는 것이 신앙의 가치와 충돌할 때, 우리는 무엇을 선택해야 할까요?
- 잘못된 시대의 흐름 속에서 '아니오'라고 말할 수 있는 용기가 얼마나 중요한지를 보여줍니다. 다수가 가는 길이 항상 옳은 길은 아닐 수 있습니다.
- 과거의 아픈 역사를 외면하지 않고 정직하게 마주해야만 진정한 화해와 새로운 미래로 나아갈 수 있다는 사실입니다.
신사참배의 역사를 배우는 것은 단순히 과거의 잘못을 비판하기 위함이 아닙니다. 이 역사는 비슷한 위기가 찾아왔을 때, 우리 각자가, 그리고 우리가 속한 공동체가 어떤 선택을 해야 할지를 비추는 중요한 거울이 되어줄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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