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교회사

거울 앞에 선 한국 교회: 신사참배의 죄와 오늘의 책임

제이람 2025. 11. 11. 23:53

  한국 교회의 역사를 논할 때, 우리는 왜 신사참배라는 특정 과거 앞에서 유독 깊은 부끄러움을 느끼는가. 이 아픈 기억을 다시 꺼내는 것은 단순히 과거사를 회상하기 위함이 아니다. 이는 오늘날 한국 교회의 영적 건강 상태를 진단하고, 미래를 향한 걸음을 바로잡기 위해 반드시 거쳐야 할 자기 성찰의 과정이다. 한때 한국 교회는 스스로 ‘하나님의 특별한 사랑을 받은 백성’이라는 선민의식에 가까운 자부심을 품기도 했다. 그러나 그 자부심은 신사참배라는 “너무나 추악한 죄” 앞에서 근본적으로 흔들리고 말았다.

 

  이 역사의 거울 앞에 서는 것은 고통스럽지만 필수적이다. 우리는 스스로에게 엄중한 질문을 던져야 한다. “과연 이 시대에 우리가 동일하게 일제의 말기 시대를 살아내고 있다면, 우리 중에 신사참배를 하지 않을 사람이 몇 명이나 될까?” 이 질문이야말로 과거의 과오를 오늘의 책임으로 가져오는 첫걸음이다.

굴복의 역사: 신사참배는 어떻게 교회를 무너뜨렸는가

  일제의 신사참배 강요를 단순한 정치적 압박으로 이해하는 것은 그 본질을 놓치는 것이다. 이는 기독교 신앙의 심장부를 겨눈, 치밀하게 설계된 영적 식민화 프로젝트였다. 1931년 만주사변과 1937년 중일전쟁을 거치며 대륙 침략의 야욕을 불태우던 일제는 국론 통일의 수단으로 신사참배를 선택했고, 그 칼날은 가장 먼저 미래 세대를 교육하는 학교를 향했다.

그 과정은 점진적이고 집요했다.

  • 학교에 대한 압박: 1935년 평안남도 공사립학교 교장 회의에서 신사참배 요구가 공식화되자, 신앙 교육을 포기할 수 없었던 장로교 계열의 숭실학교와 숭의여중 등은 저항 끝에 자진 폐교라는 고통스러운 길을 선택했다. 반면, 감리교와 캐나다 선교회 소속 학교들은 “그럼에도 불구하고 기독교 학교가 남아있는 것이 낫다”는 판단 아래 참배를 수용했다. 신앙의 노선에 따라 다른 선택을 내린 것이다.
  • 교회에 대한 전방위적 압박: 1937년 중일전쟁 이후 압박은 더욱 노골화되었다. 일제는 “1면 1신사 정책”을 강행하고, 각 가정에 간이 신사인 ‘신궁대마(神宮大麻)’ 설치를 강요하며 신앙과 일상의 모든 영역으로 파고들었다. 황국신민서사 제창과 창씨개명은 기독교인의 정체성을 뿌리부터 뒤흔드는 조치였다.

  결국 한국 교회는 공식적으로 무너져 내렸다. 1936년 로마 카톨릭이 교황의 유권해석을 근거로 신사참배를 수용한 것을 시작으로, 안식교, 성결교, 구세군, 감리교 등 대부분의 개신교 교파가 뒤를 따랐다. 최후의 보루로 여겨졌던 장로교마저 1938년 제27차 총회에서 신사참배를 가결했다. 당시 총회장 홍택기의 주도하에 통과된 결의문은 당시 교회가 어떤 논리로 자신의 배교를 정당화했는지 똑똑히 보여준다.

 

  “아등(我等)은 신사는 종교가 아니고 기독교의 교리에 위반되지 않는 본의를 이해하고 신사참배가 애국적 국가의식임을 자각하여 이에 신사참배를 솔선 여행(勵行)하고 추히 국민정신 총동원에 참가하여 비상 시국하에서 총후 황국신민으로서 적성을 다하기로 함”

 

  이 결의문은 단순한 굴복의 기록이 아니다. 이는 신앙의 언어를 동원하여 배교를 정당화하려는 처절한 자기기만의 증거이다. ‘종교’와 ‘국가의식’을 분리하는 논리는, 제1계명을 지키기보다 시대의 권력과 타협하려는 신학적 파산을 명백히 보여준다. 이 결의는 신앙의 방파제가 완전히 무너졌음을 알리는 상징적 사건이었다. 총회 직후 평양 신사를 찾은 이들의 발걸음은 여기서 멈추지 않았다. 홍택기 총회장을 비롯한 교계 지도자들은 곧바로 일본 본토로 건너가 더 큰 신사 앞에서 머리를 조아림으로써, 그들의 굴복이 일회성 타협이 아닌 전면적 투항임을 공표했다.

변절의 심화: 굴복을 넘어선 적극적 부일 협력

  신사참배 수용은 끝이 아니라 시작이었다. 수동적인 굴복에 머물렀던 한국 교회는 얼마 지나지 않아 일제의 전쟁 수행에 적극적으로 협력하는 단계로 나아가며 변절의 깊이를 더해갔다. 신앙의 첫 단추를 잘못 끼운 대가는 상상 이상으로 참혹했다.

 

  교회의 부일 협력은 조직적이고 전방위적으로 이루어졌다.

  • 인적·물적 자원 동원: 1939년 “국민정신 총동원 조선 예수교 장로회 연맹”이 결성되면서 교회는 일제의 전쟁 수행을 위한 하부 조직으로 전락했다. 국방 헌금이 모금되었고, 교회의 종은 녹여져 무기 제작에 헌납되었다. 심지어 장로교는 헌금으로 비행기를 구입해 ‘장로호(長老號)’라는 이름으로 헌납하며, 이를 다른 교단에 대한 우위인 양 자랑하는 지경에 이르렀다.
  • 신앙의 왜곡과 변질: 변절은 교회의 재산을 넘어 신앙의 본질까지 파고들었다. 일부 목사들은 삼위일체 하나님의 이름이 아닌 일본의 신 ‘천조대신(天照大神)’의 이름으로 세례를 주는 ‘미소기하라이(禊祓い)’라는 의식에 참여하는 지경에 이르렀다. 교회 건물을 일본식으로 짓도록 유도하는 등, 한국 기독교를 일본식 기독교로 변질시키려는 시도가 이어졌다.
  • 교단 통폐합: 1945년 7월, 일제는 모든 교파를 강제로 통합하여 “일본 조선 기독교 교단”을 출범시켰다. 이는 한국 교회의 고유한 정체성을 완전히 말살하려는 마지막 시도였다. 해방이 불과 한 달도 채 남지 않은 시점이었다.

  1940년대에 들어 서구 선교사들이 ‘적성국가의 스파이’로 낙인찍혀 추방되면서, 한국 교회는 마지막 영적 방파제를 잃었다. 외부의 비판과 신학적 견제를 상실한 교회 지도자들은 변절의 길에 아무런 제동 장치 없이 내달리기 시작했다. 신앙의 나침반을 잃은 한국 교회는 끝없이 표류했다.

암흑 속의 빛: 저항과 순교의 영성

  모두가 굴복과 변절의 길을 걸었던 것은 아니다. 칠흑 같은 암흑 속에서도 신앙의 순수성을 지키기 위해 자신의 모든 것을 걸었던 소수의 저항가들이 있었다. 비록 그들의 숫자는 미미했으나, 그들이 남긴 영적 유산은 오늘날까지 한국 교회의 양심을 비추는 희미하지만 꺼지지 않는 빛으로 남아있다.

 

  신사참배 반대 운동은 다양한 형태로 전개되었다.

  • 청원 운동: 박관준 장로와 안이숙 선생은 총독부를 넘어 일본 제국의회 회의장까지 찾아가 신사참배의 부당함을 알리는 건의서를 뿌리며 합법적 저항을 시도했다. 비록 체포와 옥고로 끝났지만, 불의에 침묵하지 않으려는 신앙인의 용기를 보여준 사건이었다.
  • 적극적 저항 운동: 서북 지방의 주기철 목사와 이남 지방의 한상동 목사를 중심으로 한 저항 운동은 더욱 구체적인 행동 강령을 가졌다. 이들은 신사참배를 목숨 걸고 거부하고, 자녀들을 참배하는 학교에 보내지 않으며, 타협한 교회에 출석하지 말고, 불참배 동지들끼리 가정 예배를 드림으로써 신령한 교회를 지켜나가고자 했다.

  이 저항의 정점에는 주기철 목사의 순교가 있다. 그는 설교권을 박탈하려는 일제 경찰을 향해 “나는 설교권을 하나님께 받은 것이니, 경찰서에서 하지 말라고 한다고 안 할 수는 없소”라며 자신의 신앙적 권위의 원천이 세상 권력이 아닌 하나님께 있음을 분명히 했다. 1944년 순교하기 전, 그는 ‘오종목(五種目)의 나의 기원’이라는 마지막 설교를 통해 자신의 소원을 밝혔다.

  1. 죽음의 권세를 이기게 하소서.
  2. 장기간의 고난을 견디게 하소서.
  3. 노모와 처자와 교우를 주님께 부탁합니다.
  4. 의에 살고 의에 죽게 하소서.
  5. 내 영혼을 주님께 부탁합니다.

  이 다섯 가지 기원은 한 순교자의 마지막 유언을 넘어, 고난받는 신앙의 정수를 보여준다. 그는 초인적인 용서를 구하지 않고, 오히려 인간적 나약함을 인정하며 장기적 고난을 견딜 힘을 구했다(1, 2항). 가족에 대한 애틋함과(3항) 신앙의 본질인 ‘의(義)’에 대한 갈망(4항), 그리고 최종적으로 자신의 영혼을 하나님께 의탁하는(5항) 모습은, 그의 순교가 광신적 행위가 아닌, 철저히 하나님께 의존한 신앙의 귀결이었음을 증명한다. “한 걸음만 양보하면 그 무서운 고통을 면하고 도리어 상까지 준다는데… 나같이 연약한 약졸이 어떻게 장기간의 고난을 견뎌낼 수 있겠습니까?”라며 자신의 나약함을 고백하면서도 끝까지 믿음을 지켰던 그의 순교는, 한국 교회가 완전히 암흑에 잠식되지 않았음을 증명하는 사건이었다. 이들의 저항과 순교는 해방 이후 교회를 재건할 수 있는 귀중한 영적 자산이 되었다.

청산되지 않은 과거, 오늘의 과제를 묻다

  신사참배의 역사는 1945년 해방으로 끝나지 않았다. 그 상처는 해방 이후 한국 교회의 분열과 갈등 속에 깊이 뿌리내렸고, 오늘날 우리에게 여전히 무거운 과제를 남기고 있다. 가장 큰 비극은 한국 교회가 이 문제를 제대로 청산하는 데 실패했다는 점이다.

 

  해방 후, 옥에서 풀려난 출옥 성도들은 교회 재건의 기본 원칙을 발표하며 참회와 정화를 요구했다. 그러나 대부분의 교회는 이를 실행하지 못했다. 신사참배에 적극적으로 협력했던 이들이 여전히 교권을 장악했고, 신앙의 절개를 지키기 위해 고난받았던 이들은 오히려 소외되었다. 이러한 갈등은 결국 고신 교단의 분열을 포함한 여러 교단 분열의 한 원인이 되었다. 과거를 정직하게 대면하고 회개하지 못한 대가는 이토록 컸다.

 

  “우리는 항상 신사참배를 했던 백성이다.” 이 고백은 과거에 대한 자책을 넘어, 오늘을 향한 날카로운 경고가 되어야 한다. 일제의 신사가 ‘애국적 국가의식’이라는 이름으로 포장되었듯, 오늘날의 우상 역시 ‘교회 성장’, ‘성공적 목회’, ‘사회적 영향력’이라는 거룩한 이름표를 달고 강단에 선다. 우리는 여전히 가시적인 성공과 권력의 논리 앞에서 “신사는 종교가 아니다”라고 되뇌었던 과거의 자기기만을 반복할 위험에 처해 있다.

 

  늦었지만, 고(故) 한경직 목사가 공개적으로 자신의 신사참배 과오를 참회했던 모습은 우리가 나아갈 길을 보여주는 긍정적인 사례다. 진정한 회개와 성찰만이 교회를 새롭게 할 수 있는 유일한 길이다. 신사참배의 역사를 기억하는 것은 과거에 얽매이기 위함이 아니다. 이는 어떠한 상황 속에서도 신앙의 본질을 굳게 지키고, 세상의 불의와 권력 앞에 타협하지 않는 예언자적 교회가 되기 위한, 우리 시대의 책임이자 사명임을 잊지 않기 위함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