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앙과 제국의 갈림길에서
일제강점기 말, 일본 제국주의는 대륙 침략의 야욕을 노골적으로 드러내며 한반도를 병참기지화하는 데 혈안이 되어 있었다. 이 과정에서 내선일체(內鮮一體)를 명분으로 내세운 황국신민화(皇國臣民化) 정책은 한국인의 민족정신을 말살하려는 전방위적 압박이었다. 그 정점에는 '신사참배(神社參拜)' 강요가 있었다. 일제는 신사를 국가 의례의 장소라 주장하며 모든 한국인에게 참배를 의무화했고, 이는 기독교 신앙의 제1계명인 "나 외에는 다른 신들을 네게 두지 말라"는 가르침과 정면으로 충돌했다.
이러한 시대적 압력 속에서 한국 교회는 신앙적 정체성의 중대한 위기에 직면했다. 교회를 보존해야 한다는 현실적 논리와 일제의 무자비한 탄압 앞에서, 대다수 교단과 교회 지도자들은 신사참배를 '국민의례'로 받아들이며 굴복과 협력의 길을 택했다. 그러나 칠흑 같은 암흑 속에서도 빛을 발하는 소수의 별처럼, 일부 신앙인들은 신앙의 순수성을 지키기 위해 모든 것을 걸고 저항의 길을 선택했다.
본 에세이는 그 저항의 중심에 섰던 주기철 목사의 신사참배 반대 운동과 순교가 지닌 역사적 의미를 심도 있게 분석하고자 한다. 그의 투쟁은 단순히 한 개인의 영웅적 저항을 넘어, 일제에 의해 변절되고 신앙의 본질을 상실해 가던 한국 교회 속에서 기독교 신앙의 핵심이 무엇인지를 피로써 증명한 사건이었다. 본고는 일제의 신사참배 강요 배경, 대다수 교회의 순응, 그리고 이에 맞선 주기철 목사의 치열한 투쟁과 순교 과정을 추적할 것이다. 이를 통해 그의 거룩한 저항이 해방 이후 한국 교회에 남긴 신학적, 역사적 유산이 무엇이며, 오늘날 우리에게 어떤 의미를 던지는지 다각적으로 조명할 것이다.
1. 시대의 폭풍: 신사참배 강요의 배경과 전개
주기철 목사의 저항을 올바르게 이해하기 위해서는 그가 맞서 싸워야 했던 시대의 폭풍, 즉 일제의 신사참배 강요 정책이 어떤 정치적 목적 아래 어떻게 시작되고 확산되었는지를 먼저 심층적으로 분석해야 한다. 신사참배는 단순한 문화적 강요가 아니라, 한 민족의 정신을 제국의 전쟁 기계에 종속시키려는 치밀한 식민 통치 전략의 핵심이었다.
1931년 만주사변과 1937년 중일전쟁을 일으키며 대륙 침략을 본격화한 일본 제국주의는 한반도를 안정적인 병참기지로 활용해야 할 필요성을 절감했다. 이를 위해 물리적 통제를 넘어 한국인의 정신적 복종을 이끌어낼 강력한 이데올로기적 장치가 필요했고, 그것이 바로 신사참배였다. 일제는 천황을 신격화하는 국가신토(國家神道)를 통해 '황국신민'으로서의 충성을 강요하며, 이를 대륙 침략을 위한 국론 통일의 수단으로 삼았다. 이 문제는 단순히 식민 지배자와 피지배자의 갈등을 넘어선 것이었다. 일본 내에서도 양심적인 기독교 지성이었던 우치무라 간조(內村鑑三)가 천황 숭배에 저항하다 교직에서 파면되는 등, 이는 국가가 강요하는 우상숭배와 기독교 신앙의 본질적 충돌이었다.
신사참배 정책은 교육 현장을 시작으로 사회 전반으로 단계적으로 강화되었다.
- 학교에서의 강요: 1935년 평안남도 공·사립학교 교장 회의에서 평남지사가 모든 교장에게 평양 신사 참배를 요구한 것이 기독교계에 대한 본격적인 압박의 시작이었다. 이 요구에 불응한 숭실학교의 맥쿤(George S. McCune) 교장과 숭의여중의 스누크(Velma L. Snook) 교장은 결국 파면되었고, 이들 학교는 성경 교육과 신앙의 자유를 지키기 위해 1937년 자진 폐교라는 고통스러운 결단을 내렸다. 이는 신사참배를 우상숭배로 규정하고 단호히 거부한 장로교 계열 학교들의 선택이었다. 반면, 감리교와 캐나다 장로교 선교회 소속 학교들은 기독교 교육의 명맥이라도 이어야 한다는 현실적 판단 아래 신사참배를 수용하는 길을 택했다.
- 교회와 사회 전반으로의 확산: 학교를 넘어 교회와 일반 사회로의 압박은 더욱 거세졌다. 일제는 '1면 1신사 정책'을 통해 전국 곳곳에 신사를 세웠고, 각 가정에 신궁대마(神宮大麻)라는 신주를 모시는 간이 신사 설치까지 강요했다. 1938년 국가총동원령 공포, 황국신민서사 암송 강요, 1939년 창씨개명 실시는 신사참배가 전시동원체제를 위한 전방위적 황국신민화 정책의 일환이었음을 명백히 보여준다.
이처럼 일본 제국은 완벽한 이데올로기적 함정을 구축했다. 우상숭배를 애국이라는 이름으로 포장함으로써, 한국 교회로 하여금 단순한 순응과 저항이 아닌, 두 가지 형태의 파멸 사이에서 선택하도록 강요한 것이다. 그것은 바로 영적 소멸과 물리적 소멸이었다. 비극적이게도, 다음 장에서 살펴보듯, 대다수 교회는 그 영혼을 대가로 조직을 보존하는 길을 선택하고 말았다.
2. 굴복과 순응: 대다수 교회의 선택과 그 논리
일제의 전방위적 압박 속에서 한국 교회는 어떻게 반응했는가? 안타깝게도 역사는 대다수 교회가 저항보다는 순응의 길을 선택했음을 증언한다. 이 장에서는 주요 교단들이 어떠한 논리와 과정을 거쳐 신사참배를 수용했는지, 그리고 그 선택이 어떻게 적극적인 부일 협력으로 변질되어 갔는지를 비판적으로 고찰하고자 한다.
주요 교단들의 신사참배 수용은 연쇄적으로 일어났다.
- 1936년: 로마 가톨릭 교회가 교황 피우스 11세의 결정에 따라 신사참배를 '종교적 의식이 아닌 국가적 의식'으로 규정하며 가장 먼저 수용했다.
- 이후 안식교, 성결교, 구세군, 성공회, 감리교 등이 잇따라 공식적으로 신사참배를 받아들였다.
- 1938년 9월 10일: 끝까지 버티던 한국 최대 교단인 장로교마저 무너졌다. 평양 서문밖교회에서 열린 제27차 총회는 공포 분위기 속에서 진행되었다. 총대 193명 사이사이에 100여 명의 경찰이 앉아 감시했고, 반대 의사를 표명한 블레어(방위량) 선교사의 외침은 묵살되었다. 결국 새로 선출된 총회장 홍택기의 주도 하에, 미리 준비된 각본대로 신사참배를 결의하는 성명서가 낭독되었다.
"아등(我等)은 신사는 종교가 아니고 기독교의 교리에 위반되지 않는 본의를 이해하고 신사참배가 애국적 국가의식임을 자각하여 이에 신사참배를 솔선 여행(勵行)하고 추히 국민정신 총동원에 참가하여 비상 시국하에서 총후(銃後) 황국신민으로서 적성(赤誠)을 다하기로 함"
이 결의문은 한국 교회의 공적 신학에서 하나의 분수령이 된 사건이었다. 현실적 생존의 논리가 신실한 증언의 언어를 공식적으로 대체한 순간이었기 때문이다. 국가가 현실을 규정하는 것을 용인하고 교회의 보존을 최우선 과제로 삼은 이 논리는, 하나님의 주권을 국가 권력 아래 두는 명백한 신학적 실패였다. 이러한 순응은 수동적 굴복에 그치지 않았다. 총회가 끝나자마자 부총회장 김길창을 포함한 23명의 총대들은 평양 신사로 직행하여 참배했다. 이는 신앙적 양심의 둑이 한번 무너지자, 교회가 얼마나 빠르게 세속 권력에 동조하며 변질될 수 있는지를 보여주는 상징적 장면이었다.
교회의 순응은 곧 적극적인 부일(附日) 협력으로 이어졌다.
- 비행기 헌납: 장로교는 '장로호', 감리교는 '감리교단호'라는 이름의 전투기 구입 자금을 헌납하며 일제의 침략 전쟁에 동참했다.
- 교회 종 헌납: 전쟁 물자 조달을 위해 교회 종까지 떼어내어 헌납하는 운동을 벌였다.
- 미소기하라이(禊祓) 세례식 참여: 일부 목사들은 삼위일체 하나님의 이름으로 베푸는 세례를 부정하고, 일본의 태양신 '천조대신(天照大神)'의 이름으로 침례를 받는 미소기하라이(신도식 정화 의식으로, 기독교 세례를 사실상 부정하는 행위)에 참여하는 지경에 이르렀다.
이처럼 전반적인 변절의 흐름 속에서 신앙의 절개를 지키고자 했던 소수의 저항은 점점 더 외롭고 힘든 싸움이 되어갔다. 대다수가 순응의 길을 걸을 때, 십자가의 길을 묵묵히 걸어간 주기철 목사의 투쟁은 그래서 더욱 빛을 발한다. 과연 우리는 그 시대에 있었다면 무엇을 선택했을까? 이 질문은 과거를 향한 물음이자 현재를 향한 도전이다.
3. 저항의 구심점: 주기철 목사의 신앙과 투쟁
한국 교회가 전반적으로 신사참배에 굴복하던 암담한 현실 속에서, 주기철 목사는 굴하지 않는 신앙적 저항의 상징으로 우뚝 섰다. 그의 생애와 신학, 그리고 순교에 이르는 고난의 과정은 일제강점기 말 한국 기독교가 보여준 가장 순결하고 강력한 신앙 고백이었다. 이 장에서는 그의 투쟁 과정을 집중적으로 조명하며 그가 어떻게 저항의 구심점이 되었는지 분석한다.
주기철 목사는 1897년 경남 창원에서 태어나 민족 지도자 남강 이승훈이 세운 오산학교에서 민족 교육을 받았다. 이후 김익두 목사의 부흥 집회에서 뜨거운 신앙을 체험하고 평양신학교에 입학하여 목회자의 길을 걷게 되었다. 1936년, 민족 운동의 중심지였던 평양 산정현교회에 부임하면서 그는 신사참배 반대 운동의 최전선에 서게 되었다. 민족 지도자 조만식 장로가 시무하던 산정현교회는 그의 부임과 함께 신사참배 저항의 상징적 구심점이 되었다.
주기철 목사의 저항 논리와 신학 사상은 그의 설교에 고스란히 담겨 있다.
- '일사각오(一死覺悟)' 설교: 평양신학교에서 행한 이 설교는 그의 순교 신앙의 정수를 보여준다. 그는 "첫째, 예수를 따라 일사각오요, 둘째, 남을 위하여 일사각오요, 셋째, 부활 진리를 위하여 일사각오라."고 외치며, 죽음을 각오하고 신앙의 길을 걷는 것이 그리스도인의 마땅한 자세임을 역설했다. 이는 단순한 죽음이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를 따르고 이웃을 사랑하며 부활의 소망을 증거하는 적극적인 신앙 행위로서의 순교를 의미했다.
- '오종목의 나의 기원(五種目의 나의 祈願)' 마지막 설교: 옥고를 치르다 잠시 풀려나 산정현교회에서 마지막으로 전한 이 설교는 순교를 앞둔 그의 인간적 고뇌와 신앙적 결단을 생생하게 보여준다. 그는 다섯 가지를 기도했다. ①죽음의 권세를 이기게 하여 주옵소서 ②장기간의 고난을 견디게 하여 주옵소서 ③노모와 처자와 교우들을 주님께 부탁합니다 ④의에 살고 의에 죽게 하여 주옵소서 ⑤내 영혼을 주님께 부탁합니다. 특히 두 번째 기도에서 드러난 그의 고백은 처절하다. "한 걸음만 양보하면 그 무서운 고통을 면하고 도리어 상까지 준다는데... 하물며 나같이 연약한 약졸이 어떻게 장기간의 고난을 견디며 배겨낼 수가 있겠습니까?"
그의 이 기도는 단순한 수사가 아니었다. 아들의 증언에 따르면, 일제는 그를 회유하기 위해 의도적으로 고문의 강도를 조절했다. 죽기 직전까지 고문한 뒤 집으로 돌려보내 회복하게 하고, 몸이 좀 나아지면 다시 체포해 고문하는 잔인한 과정을 반복했다. 육체의 고통과 가정의 안락함 사이를 오가게 하며 그의 의지를 꺾으려 했던 것이다. 이 악랄한 고문 속에서 '장기간의 고난'을 견디게 해달라는 그의 기도는 뼈를 깎는 절규였다.
그의 신앙은 국가 권력 위에 하나님의 권위를 두는 것이었다. 일제 경찰이 설교를 금지하려 하자 그는 이렇게 답했다.
"나는 설교권을 하나님께 받은 것이니 하나님이 하지 말라고 하면 그만둘 것이요, 내 설교권을 경찰에서 받은 것이 아닌 즉 경찰서에서 하지 말라고 한다고 안 할 수는 없소."
1938년부터 시작된 그의 고난은 7년 가까이 이어졌다. 반복적인 투옥과 상상을 초월하는 고문, 그리고 "너만 유별나게 구느냐"는 동료 목사들의 회유와 압박 속에서도 그는 끝까지 신앙의 절개를 굽히지 않았다. 결국 1944년 4월 21일, 그는 평양형무소 차가운 바닥에서 "하나님이여, 나를 붙드시옵소서"라는 마지막 기도를 남기고 47세의 나이로 순교했다.
주기철 목사의 투쟁은 개인의 영웅적 행위를 넘어, 암흑기 한국 교회에 신앙의 순수성을 지키는 것이 가능하다는 것을 보여준 살아있는 증거였다. 그의 순교는 변절의 시대에 신앙의 기준이 무엇인지를 명확히 제시한 등불이었으며, 해방 이후 한국 교회에 깊고 지워지지 않는 유산을 남겼다.
4. 남겨진 유산: 저항과 순응의 역사적 귀결
해방은 도둑같이 찾아왔다. 일제의 압제가 사라진 자리에서 한국 교회는 재건의 과제를 안게 되었다. 그러나 신사참배라는 거대한 역사적 과오 앞에서 교회는 통일된 길을 걷지 못했다. 주기철 목사의 순교로 대표되는 '저항의 길'과 대다수 교회가 선택했던 '순응의 길'은 해방 이후 한국 교회에 서로 다른 유산을 남기며 갈등과 분열의 씨앗이 되었다.
저항의 유산: 순결주의와 분열
주기철 목사와 함께 신사참배를 거부하다 옥고를 치른 이들은 '출옥성도(出獄聖徒)'라 불렸다. 해방과 함께 풀려난 약 20여 명의 출옥성도들은 신앙의 순결을 지켰다는 자부심을 가지고 교회 재건의 중심이 되고자 했다. 이들은 1945년 9월, 평양 산정현교회에 모여 '한국 교회 재건 기본 원칙'을 발표하며 신사참배에 동참했던 교회 지도자들의 회개와 자숙을 촉구했다.
그러나 이들의 신앙적 순결주의는 기존 교회의 기득권과 충돌했다. 신사참배에 협력했던 지도자들이 교권을 그대로 유지하고 있는 상황에서 출옥성도들의 정화 운동은 환영받지 못했다. 결국 이러한 갈등은 교단 분열의 한 원인으로 작용했다. 특히 한상동 목사를 중심으로 한 이남지방의 저항 그룹은 기존 장로교 총회와의 신학적, 정치적 갈등 끝에 별도의 신학교를 세우고 교단을 형성했는데, 이것이 오늘날 대한예수교장로회(고신)의 시작이다. 이는 신앙의 순수성을 지키려는 고귀한 노력이 현실 교회와의 갈등 속에서 어떻게 분열이라는 역사적 결과로 이어질 수 있는지를 보여주는 사례이다.
순응의 유산: 청산되지 못한 과거와 도덕적 권위 실추
반면, 대다수 교회가 걸었던 순응의 길은 더 큰 후유증을 남겼다. 해방 후 한국 교회는 신사참배라는 우상숭배의 죄를 조직적이고 철저하게 회개하고 청산하지 못했다. 일부 총회에서 신사참배 결의를 취소하는 성명서를 발표하기는 했지만, 한국 교회 전체를 아우르는 진정한 참회는 이루어지지 않았다.
신사참배에 적극적으로 협력했던 지도자들이 아무런 책임도 지지 않고 교권을 그대로 유지한 것은 교회의 도덕적 권위를 심각하게 실추시켰다. 우상숭배의 죄를 씻어내지 못함으로써, 교회는 해방 이후의 수많은 갈등을 헤쳐나갈 영적 권위를 상실했다. 타협으로 권력을 유지한 리더십은 불신과 분열의 씨앗을 잉태했고, 이는 고신 교단의 분열을 포함한 이후의 역사에 직접적인 영향을 미쳤다. 이 문제는 오랫동안 한국 교회의 잠재된 과제로 남았다. 1992년, 세계적 권위의 템플턴상 수상 자리에서 한국 교회의 대표적 지도자였던 한경직 목사가 "저는 죄인입니다. 신사참배를 했습니다."라고 공개적으로 참회한 것은, 이 문제가 반세기가 지나도록 청산되지 못한 채 한국 교회의 양심에 무거운 짐으로 남아있었음을 보여주는 단적인 예이다.
결론적으로, 주기철 목사의 순교는 한국 교회에 '저항의 기억'을 심어주어 고난의 때에 신앙이 무엇을 지켜야 하는지에 대한 영원한 기준점을 제시했다. 하지만 청산되지 못한 '순응의 역사'는 오늘날까지도 한국 교회가 성찰하고 극복해야 할 무거운 과제를 남겼다.
역사 속에 새겨진 신앙의 의미
일제의 신사참배 강요라는 극한의 상황 속에서 한국 교회는 굴복과 저항이라는 극명한 두 갈래의 길을 걸었다. 대다수는 교회를 보존한다는 명분 아래 순응과 협력의 길을 택했고, 그 과정에서 신앙의 본질을 잃고 세속 권력의 시녀로 전락하는 아픔을 겪었다. 그러나 그 암흑의 시대 속에서도 주기철 목사를 비롯한 소수의 신앙인들은 목숨을 걸고 저항의 길을 선택함으로써 신앙의 순결을 지켜냈다.
주기철 목사의 순교는 단순한 비극을 넘어, '신앙은 무엇이며, 교회는 어떠해야 하는가'라는 근본적인 질문에 대한 가장 강력하고 순결한 대답이었다. 그의 '일사각오' 신앙은 어떠한 세속적 권력이나 위협 앞에서도 그리스도에 대한 절대적 충성이 신앙의 핵심임을 증언했다. 그는 자신의 삶과 죽음을 통해, 교회의 생명은 건물의 크기나 교인의 숫자에 있는 것이 아니라, 진리를 향한 불굴의 순수성에 있음을 웅변적으로 보여주었다.
따라서 그가 피로 새긴 역사는 기념해야 할 유물이 아니라, 모든 세대에게 던져지는 살아있는 질문이다. 압도적인 힘의 논리 앞에서 교회는 건물과 교인 수로 자신의 존재를 증명할 것인가, 아니면 오직 한 분 주님을 향한 흔들림 없는 충성으로 자신을 정의할 것인가? 주기철 목사의 삶은 그 대답이 무엇이어야 하는지를 영원히 증거하고 있다.
'한국교회사' 카테고리의 다른 글
| 우리가 몰랐던 한국 기독교의 5가지 얼굴: 해방과 전쟁 속 충격적 실화 (0) | 2025.11.18 |
|---|---|
| 일제 강점기의 아픈 기억: 신사참배 이야기 (0) | 2025.11.12 |
| 거울 앞에 선 한국 교회: 신사참배의 죄와 오늘의 책임 (1) | 2025.11.11 |
| 어둠 속의 촛불: 일제강점기, 신앙의 기로에 선 사람들 (0) | 2025.11.11 |
| 신앙의 등불, 주기철 목사 이야기 (0) | 2025.11.11 |